디렉토리분류

밝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 『명심보감』과 추적 선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042
한자 - 明心寶鑑- 秋適 先生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집필자 하창환

[정의]

『명심보감』의 편자로 알려진 추적 선생의 생애와 그 편저와 관련된 이야기.

[개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노당(露堂) 추적(秋適)[1246∼1317]이 편저한 어린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한문 교양서이다. 추적은 고려충렬왕 때의 인물로 과거에 급제하여 민부상서(民部尙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안향(安珦)[1243∼1306]에 의해 발탁되어 7품 이하의 관리 혹은 생원들에 대한 유학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이때 『명심보감』을 편찬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730번지에 위치한 인흥 서원(仁興書院)에 '명심보감 판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1995년 5월 12일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하는 『명심보감』은 1869년(고종 6) 추세문(秋世文)이 출판한 인흥재 사본이 전수되어 국역 출판된 것이다. 이것은 총 31장으로 인흥 서원의 목판이 유일하다. 여기에서는 추적 선생의 일생과 『명심보감』에 대해 알아보고, 아울러 추적 선생이 배향된 인흥 서원의 현대적 가치를 전망해 본다.

[대들보 위의 명심보감]

달성의 남쪽 비슬산(琵瑟山) 아래에 한 자연 부락이 있으니, 이름하여 인흥(仁興) 마을이다. 이곳은 1261년(원종 2) 과거에 급제하여 민부상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헌공(文憲公) 노당 추적 선생이 묻힌 곳이다. 1861년(철종 12) 10월 3일 선생의 20대 손인 추세문과 팔도 유림의 뜻을 모아 터를 닦기 시작하여, 1866년(고종 3) 9월 20일 인흥 서원을 건립하고 선생을 봉향하였다. 사당인 문현사(文顯祠)와 판목(版木)과 서적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藏版閣)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추적의 신도비각 및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1971년 12월 13일 인흥 서원의 대들보 위에서 『명심보감』의 목각본(木刻本) 판목 31매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당저 기사 신간 광판 우대구 인흥재사(當宁己巳 新刊匡板 于大邱仁興齋舍)"라는 간기(刊記)가 새겨져 있었다. 이 말은 "지금 임금님께서 기사년이 되는 해에 대구의 인흥재사에서 목판을 바로잡아 새롭게 간행한다."라는 뜻이다. 서원의 건립 연도와 연계해 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지금의 임금님은 고종(高宗)이 되며, 기사년은 1869년이 된다. 그리고 그 범례(凡例)에 보면 "노당 선생께서 후학들을 가르칠 책을 만들기 위해 여러 전적들에서 모으고 보충하였다는 것은 오직 이 책의 보존에 의해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어 판목이 닳아 없어져 그릇되고 잘못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바르게 고쳐 판목을 새긴다."라고 하였다. 이 말들을 보면 『명심보감』은 추적 선생이 편찬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후손들이 발간한 『추씨 구백년사(秋氏九百年史)』에 따르면 『명심보감』은 1305년(충렬왕 31)에 추적 선생이 중국의 승려인 담수(曇秀)가 지은 『인천보감(人天寶鑑)』을 참고하여 편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선생의 손자인 추유(秋濡)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다. 즉 추유가 1363년 중국으로 건너가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병부 시랑(兵部侍郞)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할아버지인 추적 선생의 『명심보감』을 중국에 가져가 보급했다는 것이다.

추씨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 그 진위를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먼저 추적 선생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선생의 삶이 『명심보감』의 어떤 구절로 이해되는가 알아보고, 아울러 『명심보감』이라는 책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추적 선생과 명심보감]

추적 선생은 1261년(원종 2)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 맡은 관직이 안동서기(安東書記)였다. 그후 직사관(直史館)에 선발되었다가 여러 관직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에 올랐을 때였다. 1298년(충렬왕 24)에 내시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 합덕 부곡(合德部曲)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고 하였지만 추적 선생은 그 문서에 서명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황석량은 석천보(石天補)·김광연(金光衍)과 결탁하여 없는 죄를 꾸며 임금에게 추적 선생을 고해바쳤다. 이에 임금은 화를 내며 추적 선생을 즉시 순마소(巡馬所)에 가두게 하였다. 추적 선생이 당한 이러한 상황을 『명심보감』에서 찾아보면, 「성심편(省心篇)」의 "뇌물을 받은 자는 천하에 차고 넘치는데, 죄는 박복한 사람에게만 걸려든다."라는 말에 해당된다.

『명심보감』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책이다. 그래서 그 첫째 편명이 '선행을 계속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계선편(繼善篇)」이다. 이렇게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실이 그 반대의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추적 선생이 내시 황석량에게 당하는 일처럼 사회에서 무고를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에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역설로써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비록 무고였지만 임금의 노여움을 샀기에 감찰 기관인 순마소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압송하던 관원이 추적 선생에게, "샛길로 곧장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추적 선생은 죄인의 신분이었기에 오라와 같은 것에 묶여 끌려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관직에 있던 사람이 끌려가는 모습을 행인들이 보면 창피해 할 것 같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고 빨리 갈 수 있는 샛길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관원이 추적 선생에게 제안했다고 본다.

하지만 추적 선생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며, "무릇 죄가 있는 자는 모두 유관 관사(官司)에 돌려보내지, 왕의 처소에서 칼과 쇠사슬을 채운 적이 없었다네. 그러니 내가 마땅히 관도(官道)로 가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려 하네. 왕의 간관(諫官)으로서 칼을 쓴다는 것도 또한 족히 영광이니, 하필 아녀자들이 골목길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을 본받아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추적 선생은 너무도 당당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잘못한 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생에게 가해지고 있는 처사도 전혀 올바른 것이 아니었다. 만약 선생에게 죄가 있다면, 마땅히 그 죄를 조사하여 죄의 유무를 밝힌 뒤에 벌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임금은 총애하는 내시의 말만 믿고 그 자리에서 칼과 쇠사슬을 채워 끌고 가게 했는데, 이는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잘못한 일이다. 더구나 추적 자신은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바른말을 하는 것이 의무인데, 자기의 의무에 충실하다 오히려 죄를 받았으니 부끄러워 숨어 다니는 아녀자들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실린, "대장부는 착한 일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명예와 절개를 태산보다 더 무겁게 여기고, 마음을 강직하게 쓰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기러기의 털보다 더 가볍게 여긴다."는 구절은 추적 선생의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추적 선생이 보여 준 태도는 가히 대장부의 그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난 앞에서 움츠러들거나 겁을 집어먹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한 투지와 용기로 그에 맞서고자 했다. 그리고 당면한 고난도 그런 투지와 용기로 극복했다. 그것은 추적 선생이 좌사간보다 높은 벼슬인 민부상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후에 벼슬에서 물러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에서 추적 선생을 성품이 활달하고 거침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추적 선생이 관직 생활에서 보여 준 거침없는 태도는 그의 일상생활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선생의 그러한 면모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손님 접대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이다. "손님을 대접하는 데는 단지 흰쌀밥을 부드럽게 짓고 생선을 썰어 국을 끓이는 것으로도 된다. 하필 많은 돈을 써서 여덟 가지 진미를 차려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님을 접대하려면 최고의 성의를 보여야 하고, 가능하면 값비싼 음식을 많이 차려 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하지만 추적 선생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선생은 손님을 접대하는데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선생이 손님에게 보인 성의는 바로 흰쌀밥에 생선국을 끓여 내는 일이었는데, 선생이 평소에 이런 음식을 최고의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적 선생의 이러한 생활 태도를 『명심보감』에서 찾는다면, 「정기편(正己篇)」의 "음식이 담박하면 정신이 상쾌하고, 마음이 맑으면 꿈과 잠이 편안하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음식을 담박하게 먹는다는 것은 한 가지 음식만을 먹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골라먹고 가려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르고 가린다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매여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되면 음식을 먹는데 욕망이 끼어들어 정신은 흐려지게 마련이다. 그런 흐려진 정신은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꿈과 잠자리까지 어지럽힌다.

추적 선생이 손님을 접대하는 태도를 보면 평소의 생활이 얼마나 담박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생활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데 있어서도 분명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이 말년까지 건강하게 검소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명심보감과 추적 선생의 가르침]

『명심보감』이라는 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성현들이 베풀어 준 가르침의 말씀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리고 책의 제목을 보면 우리의 마음을 밝히고 또 비춰 주는 거울이라고 한다. 어떻게 해서 그 말씀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밝히고 비춰 준다는 것은 두 가지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성인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해 주고, 또 그 밝음으로 해서 우리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왜냐하면 성현의 말씀은 그 어느 것이나 한 개인을 넘어 모두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현의 말씀이란 한 개인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현의 말씀은 욕심이라는 그늘에 가려진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환히 드러나게 하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앞에서 추적 선생의 삶을 살펴보았다. 선생은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또 욕심을 털어낸 담백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런 선생의 모습은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들춰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추적 선생은 우리에게 하나의 『명심보감』이 되지 않겠는가?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