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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390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였던 시기 달성군의 역사.

[개설]

1910년(순종 4)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었다. 조선 총독부는 총무·내무·탁지·농상공의 행정 부처와 사법부를 두고, 지방은 도(道)·부(府)·군(郡)·면(面)의 행정 체계를 갖추었으며,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총리대신을 거쳐 천황에 상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일제는 '조선의 일본화'라는 동화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제국주의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또 조선 통치의 최고 방침은 내선 일체화, 곧 궁극적으로 조선을 시코쿠화·규슈화하는 철저한 동화주의 정책이었다.

[달성군의 현황]

달성 지역은 조선조 대구군(大丘郡)으로 편성되어 있다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1914년에 행정 구역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달성군이 되었다. 곧 시가지인 대구부를 제외하고 현풍(玄風)과 병합하여 탄생하였는데, 성북면·공산면·해안면·수성면·가창면·성서면·다사면·하빈면·성서면·월배면·화원면·옥포면·현풍면·유가면·구지면·논공면 등 16개 면과 173동으로 구성되었다. 달성군의 인구는 1928년의 경우 13만 3000명 정도로 경상북도의 인구 227만 명 중 5.8%를 차지하였다.

[달성군의 인구와 사회]

달성군 인구의 산업별 인구는 농업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그중 소작농의 비중이 86.2% 정도로 농민의 빈궁화가 심각하였다. 1928년 기준 달성군 생산의 농작물은 보리, 쌀, 콩 등의 순서로 비중이 컸다. 달성군 생산의 특용 작물은 면, 대마, 닥나무, 환, 검은깨, 왕골, 버들 등의 순서로 재배되었다. 또한 잠업의 경우 1916년의 생산액은 266석 정도였고, 1934년에는 5,395석으로 생산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다. 달성군의 주요 시장을 1934년 기준으로 보면, 백안시·하빈시·화원시·해안시·김포시·구천시·구지시 등 7개의 시장이 열렸다. 또 일제는 달성군에 조선 부식 농원, 권농 공제 조합 등의 사회사업 단체와 대구 나 병원, 대구부 회생 병원, 대구 행려 병원 구호사 등의 사회사업 시설을 설치하였다. 달성군의 치안은 대구 경찰서 관할에 두고 주재소를 설치하였고, 1937년에 소방 조직으로 경방단을 운영하였다.

[달성군의 식민지 농업 정책]

일제는 1910년대 식민지 농업 정책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해 식민지 지주제를 형성하였고, 1920년대에 산미 증식 계획을 통해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하였다. 일제는 이에 기초해 농업·농민에 대한 계통적 지배 체제를 수립해 나갔다. 곧 지주회의 조직, 면작 조합, 잠업 조합, 삼림 조합의 설립이 그것이었고, 1920년대에는 모든 농업 단체를 통합한 계통 농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식민지 농업 지배 체제에 의거해 조선의 농업을 일제의 수탈에 적합한 종속적 상품 생산 체제로 재편하는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그리고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면서 수리 조합을 만들어 나갔는데, 달성에는 수성 수리 조합, 동부 수리 조합, 해안 수리 조합 등이 설립되었다. 일제 농정의 실시에 따라 농촌 경제는 극심한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사정은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에 걸쳐 농업 공황을 수반한 세계 대공황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달성군과 전쟁 동원 정책]

1930년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수탈 정책은 더욱 다면화되고 강화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1932년에 농촌 진흥 운동을 추진하였다. 농촌 진흥 운동은 경제적으로는 농가 경제의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개별 농가를 상대로 노동 강화, 근검절약, 경영 다각화 등을 강요함으로써 침략 전쟁에 필요한 농산 자원을 최대한 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결국 농촌 진흥 운동은 농가 경제를 안정시키는 정책이 되기보다 도리어 농업과 농민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이 되었다. 특히, 농촌 진흥 운동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의 도발과 함께 추진한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더욱 강화되었다. 일제는 중 일 전쟁 이후 전쟁 동원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달성 포함 7개 군을 대상으로 한 군사 후원 지원 체계로서 7군 연맹을 조직하였다. 1938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 연맹을 출범시켜 달성군에서도 황국 신민화 정책과 전쟁 동원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강점기 달성군의 민족 독립운동]

1910년대 달성군의 민족 운동은 달성 친목회와 강유원 간친회를 통해 전개되었다. 1919년 3·1 운동기에 달성군은 대구의 만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달성군에서도 동화사(桐華寺) 지방 학림의 대구 남문 시장 운동, 수성면 대명동 만세 운동, 공산면 미대동 만세 운동 등이 일어났다. 또 3·1 운동기 달성 친목회를 통해 만세 운동 확산 노력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 그리고 파리 만국 평화 회의 독립 청원서 제출 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또한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 달성군에서는 일본 유학생 독립운동 자금 조달 사건[일명 이용로 사건],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 독립 자금 마련 운동, 신흥 무관 학교 폭탄 사건, 이현수의 독립 자금 모집 운동과 워싱톤 회의 청원 운동, 지린성 군정서 흥업단 군자금 모집 사건, 관공리를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 권고 활동, 김판경의 독립 격문 시위, 김석주의 비밀결사 결성 사건 등이 다방면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대 달성군의 민족 운동은 1923년 일본 경찰 가이[甲斐] 순사 살해 사건[일명 제2 경북 중대 사건]의 발생과 의열단 폭탄 반입 사건[일명 황옥 사건], 제2차 유림단 사건 등 국외와 연계된 의열단 투쟁과 유림계의 독립운동과 연관되었다. 또한 달성군 지역민의 일제 통치에 저항하는 투쟁이 수차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곧 달성군 수성면민의 가창면 순사주재소 습격 사건, 구지면민과 성서면민의 자치 요구 투쟁 등이 펼쳐졌다. 또한 청년 운동과 소년 운동, 형평 운동 등의 대중 운동,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필두로 한 달성군 농민 운동, 신간회 대구 지회 화원 분회를 통한 민족 협동 전선 운동 등의 민족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 전시 체제가 운영될 때, 대구 사범 학교 비밀 결사 무우원에의 참여, 일본시마무라[島村] 토공 회사에서의 독립운동 등이 펼쳐쳤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완전한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 건국 동맹 달성군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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