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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만세운동 참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414
한자 大邱 萬歲運動 參與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연표보기 - 서문 시장에서 만세 시위 운동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연표보기 - 남문 시장에서 만세 시위 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서문 시장 - 대구광역시
종결 장소 남문 시장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 만세운동

[정의]

1919년 달성 군민이 참여한 대구 독립 만세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는 민족 동화 정책을 기초로 해서 한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한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경제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소작 조건을 악화시키고, 자소작농을 소작농으로 몰락시켰다. 이로 인해 각계각층에서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이 높아 갔다. 여기에 미국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와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전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대구에서는 1919년 3월 8일 서문 시장과 3월 10일 남문 시장에서 두 차례 만세 시위 운동이 발생하였으며, 대구 인근 지역을 비롯해 경상북도 각 지역에 만세 시위 운동을 파급시켜 민족 독립운동을 고조시켰다. 대구 지역의 기독교계 및 계성 학교와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장날에 모여든 시민들까지 참여하여 만세 시위 운동이 확산되었다. 대구 만세 시위 운동의 영향으로 대구 고등 보통 학교에서는 3월 24일까지 동맹 휴학 투쟁이 벌어졌으며 5월 20일에야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4월 17일에는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했던 계성 학교의 김수길(金壽吉)이 동교의 허성도(許聖徒), 이명건(李命健)[이여성] 및 목사 최재화(崔載華) 등과 함께 혜성단(慧星團)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민족 독립운동을 심화시켰다. 대구3·1 운동에 참여한 달성군 출신의 인물 중 일부를 들면, 박남준(朴南俊)[27세], 정원조(鄭元祚)[22세, 대구 고등 보통 학교 6년생], 김재범(金在範)[20세, 대구 고등 보통 학교 3년생], 박성용(朴聖容)[17세, 대구 고등 보통 학교 3년생], 장해동(張海東)[19세, 대구 고등 보통 학교 1년생], 이석도(李碩道)[17세, 대구 고등 보통 학교 1년생] 등이었다.

[결과]

대구에서의 1, 2차 만세 시위 운동을 통해 실형을 언도받은 75명을 분석해 보면, 우선 참가자의 연령은 최저 15세[이규환, 학생]에서 56세[이덕주, 농업]까지 다양하였다. 10대 21명, 20대 32명, 30대 13명, 40대 7명, 50대 2명으로서 10대에서 30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직업별 분포도를 보면 기독교 5명, 교사 9명, 의료업 2명, 학생 44명, 농업 10명, 상업 3명, 노동 3명 등으로 종교계와 청년 지식인이 주축이 되면서 민중들이 민족 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양상이었다. 법적 처리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에서 6개월까지 실형을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전민족적 항일 운동인 3·1 운동의 여파로 대구에서 전개된 만세 독립운동에 달성군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심화시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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