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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628
한자 郭再祐 神道碑
이칭/별칭 신도비,홍의 장군 신도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구례길 108[가태리 584-6]
시대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51년연표보기 - 곽재우 신도비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1957년 - 곽재우 신도비 중수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52년 - 곽재우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17년 - 곽재우 사망
현 소재지 곽재우 신도비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구례길 108[가태리 584-6]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관련 인물 곽재우
재질 석재
크기(높이) 귀부 31㎝[높이]|140㎝[너비], 비신 265㎝[높이]|93㎝[너비]|53.8㎝[두께]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있는 의병장 곽재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

[개설]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 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 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고,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스스로 ‘천강 홍의 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였다. 수십 명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명에 이르렀고, 이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다. 죽은 뒤에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 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忘憂堂集)』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위치와 현황]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 구례 마을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각 안에 2기의 비가 유존하고 있다. 이 중 우측의 비가 곽재우, 좌측의 비가 곽준의 신도비이다. 비각의 북쪽에는 곽재우곽준을 배향하는 예연 서원이 지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비의 우측면 내용에 의하면, 비는 1751년(영조 27) 이곳에 건립되었으나 6·25 전쟁 당시 파괴되었던 것을 1957년 중수하였다고 한다.

『달성군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의 곽재우·곽준 신도비 설명에 의하면 누구의 비인지는 기술되지 않았지만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보이는 비편[높이 116㎝, 너비 48㎝, 두께 38㎝]이 동쪽 담장 아래에 남아 있고, 귀갑(龜甲) 문양이 양각된 귀부 편[높이 110㎝, 너비 160㎝] 일부가 비각 서쪽에 유존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 주변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비각은 최근 새롭게 건립되었거나 중수된 것으로 보이며 담장은 없어졌다. 담장에 있던 남쪽 출입문은 담장 없이 비각 우측에 서 있다.

[형태]

중수된 신도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이루어져 있다. 귀부 높이 31㎝, 너비 140㎝이고, 비신 높이 265㎝, 너비 93㎝, 두께 53.8㎝이다.

[금석문]

전액에 '증 판서 망우당 곽재우 신도비(贈判書忘憂堂郭再祐神道碑)'라 써 있다. 전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 판서 망우당 곽재우 신도비

유명조선국 증 자헌대부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시 충익공 행가선대부 함경도 관찰사 겸 순찰사 병마수군 절도사 함경부 윤 망우당 곽선행 신도비명 병서

대제학 권유 지음

옛날부터 충신 의사(義士)가 감발분기(感發憤起)하여 사업을 일으킴은 대부분 나라가 위태롭고 혼란한 시기에 있어서였으니, 그 충성과 의용(義勇)은 혼란한 시기를 만나지 아니해도 대개 본래 타고난 것이리라. 안타까운 것은 조정에서 일찍 망우당(忘憂堂)을 과거에 합격시켜 병사(兵使)로서 왜란(倭亂)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게 했음이다. 전쟁을 알리는 왜군의 북소리와 말방울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데도 군주를 속이면서 총애와 이익을 추구하던 신하들이 거의 패배하여 도망감으로 인해 나라가 거의 망해 갈 무렵에 미쳐서야 망우당은 맨주먹으로 일어나 신명(身命)을 바쳐 대란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병사는 고독하고 기세는 초조하여 어렵고 위태로움의 고통 속에서 뜻한 바대로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헐뜯는 무리들에게 제재되어 다시 소를 올려 해명하는 압박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도 못했으며 조정의 보답도 합당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뒷날 뜻이 있는 의사들이 통한스럽게 여기는 바이었다.

망우당 곽 공의 후손이 공의 행적과 사실을 갖추어 나에게 신도비문을 요청하기에 나는 그 행장을 읽고서 일어나 말하되 '공은 고금(古今)의 제1인자입니다. 이것은 내가 일찍이 감복하고 비탄스럽게 여겼던 바, 후세에 명확히 알리기를 원한 일이었으나 오직 그 의열(義烈)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할까 두려워 감히 사양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휘는 재우(再祐)요, 자(字)는 계수(季綏)로 현풍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행실이 돈독 중후하고, 부모를 섬김에 효성스러웠으며, 훤칠한 기국과 도량이 있었고, 사물의 이치와 세상의 실무에 통달하였으며, 구차스러운 견해에 얽매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향리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세상과 함께 함에 있어서는 남보다 다를 바가 없었으나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바에 이르러서는 문득 용감하게 나아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뜻을 지키기를 견실하고 엄격히 하여 당세에 기울어지거나 빼앗기지 아니하는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

14세에 『춘추(春秋)』를 배움에 경전의 뜻을 궁구하기 위해 계부(季父)인 참의공 규(赳)에게 나아가 그 뜻을 물으니, 참의공은 말하되 '너는 이미 스스로 통달해 깨달았으니 내가 너를 더 계발해 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크게 사색하고 더욱 정밀 오묘하게 궁구함에 공의 시종 행위는 이 『춘추』를 근본으로 하였다. 또 널리 병서(兵書)를 보고 대의(大義)를 깨달았으며 때때로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기도 했다. 일찍이 부친 정암공(定庵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들어갔을 때 관상을 보는 사람이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뒷날 반드시 천하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서울에 가서는 뜻을 펴지 못했다. 또 정시(庭試) 을과(乙科)에 합격하였으나 답안 가운데 금기 사항에 저촉되는 말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병술년에 부친 정암공의 상을 당함에 상례를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했다. 상중에 측실 부인이 합천에서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 한번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공은 끝내 만나주지 않으면서 말하되 '죽거든 나에게 말하라'고 하였다. 그가 예절을 지킴이 대부분 이와 같이 엄격하였다. 부친의 삼년상을 마침에 과거 응시를 단념하고 의령(宜寧)에 있는 기강(岐江) 가에서 고기잡이나 하면서 늙어가기를 결심하였다.

그 뒤 4년 되던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영남 지방 여러 성읍(城邑)의 육군과 수군이 그 소문을 듣고 다 도망을 감에 마침내 어느 한 관리도 능히 왜적을 방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왜적은 제멋대로 침략하여 바로 서울을 쳐들어옴에 임금님은 서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에 공이 분개하면서 말하되 '남의 신하가 되어 적군이 이르렀으나 능히 방어하지 못하고 앉아서 적군으로 하여금 임금님을 공격하게 하는 무리는 목을 베어야 한다'고 하면서 가재(家財)를 털어 장사들을 모집, 드디어 그 계획한 까닭을 가묘(家廟)에 고하고 집안 종 10여 명과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처음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적군을 공격하면서 스스로 천강 홍의 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고 하였다.

그때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온 지 열흘이 되기 전에 온 나라가 진동, 백성들은 아침저녁 조급하기만 하여 귀착할 곳이 없었다. 공이 거느린 장병들은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으나 적군의 세력은 강력하여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오로지 충의로써 사졸들을 격려하고 군율을 엄격히 하여 방어할 기틀을 살피면서 연달아 적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하여 적군을 죽이고 사로잡음이 많음에 백성들은 공을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했으며 의사들은 더욱 따랐다. 그때 초계(草溪)의 수령이 도망을 가고 없으므로 그 병기를 가져왔으며, 의령(宜寧)은 무너졌으나 신반(新反)의 창고는 완전했기 때문에 그 창고의 곡식을 실어와 군량으로 공급하자 병사들의 세력이 차츰 진작되었다. 지산(砥山)에 진을 치고 낙동강 연안 수십 리에 병졸들을 배치하여 적군을 막음으로써 적군으로 하여금 낙동강 서쪽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였다.

적장 안고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가 호남 지방으로 향하겠다고 외치면서 병사를 거느리고 정암진(鼎巖津)을 건너려고 했으나 앞에 진흙 수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정탐병을 시켜 나무 말뚝을 세워 군사들이 건너갈 수 있는 안전한 곳을 표시해 두고 다음 날 새벽녘에 건너려고 하였다. 공은 정암진의 수십 리 밖에서 그 사실을 정탐하여 알고 밤사이 그 표시해 둔 나무 말뚝을 빼어 수렁이 있는 곳에 옮겨 꽂아 두고 위장 매복, 적군을 기다렸다. 적군이 도착하자 예상대로 그 나무 말뚝으로 표시해 둔 수렁으로 침범하여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와 같이 적병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복병들이 일어나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얼마 뒤 적병들은 합세하여 공격해 옴에 공이 용감한 장수 수십 명을 뽑아 자신과 같이 다 붉은 옷을 입고 흰말을 타게 하여 여러 지점에 나누어 배치하면서 말하되 '만일 적군이 다가옴을 보거든 서로 바꾸어 출몰하기를 비바람이 지나가듯이 하여 적으로 하여금 손을 쓰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크게 외치면서 앞으로 달려 나가 적군의 성루에 접근하여 적군을 유인하였다. 적군이 공의 옷과 말을 보고 반드시 장군이라고 여겨 온 군사들이 추격해 왔다. 10여 리 정도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럽게 숲이 우거진 골짜기로 들어가 버리자 적군은 공의 흔적을 잃어버렸다. 멈추어 서서 멀리 바라보니 맞은 편 산 위에 또 붉은 옷을 입고 흰말을 탄 장군이 북을 치고 외치면서 나타났다. 적군이 크게 놀라 추격했으나 또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그제야 여러 곳에 배치된 홍의(紅衣)를 입고 백마(白馬)를 탄 기병들이 서로 바꾸어 나타남에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숨어서 깃발을 흔들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 산골짜기를 진동시켰다. 적군들은 아군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어 더욱 놀라고 의심하여 ‘신(神)과 같다’고 하면서 전진하지 못했다. 이때 공의 복병들은 활로 사격하여 많은 적군을 죽였다. 적군들은 남강(南江)에 접근했으나 패배하여 끝내 정암진을 건너지 못했다. 이때 공이 충성심을 발휘하여 적은 군사로 많은 적군을 격파하지 못했다면 경상 우도의 여러 성들은 거의 다 함락되고 말았을 것이다.

공이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晬)가 후퇴하여 초계에 주둔하고 있음에 공은 그를 맞아들여 목을 베려고 했으나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공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자 순찰사 김수는 이미 북쪽으로 조령을 넘어가 버렸고,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공사(公私)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음에 공이 비로소 계획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김수가 거느리고 갔던 군사를 다 잃어버리고 다시 도망쳐 돌아옴에 공은 군중들에게 말하되 ‘임금님의 명령으로 한 도(道)의 순찰사가 된 사람이 적군을 만나자 수비하고 전쟁할 계획을 하지 아니하고 도경을 넘어 도망을 했다가 패배하고 또 도망쳐 돌아오니 그 죄는 마땅히 죽여야 한다’하였다. 그리고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여덟 가지의 죄목을 헤아렸으며 또 그 죄를 열거하여 피난길에 있는 임금님에게 보고하는 일면 여러 의병장들에게도 알린 다음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려고 하였다.

김수는 두렵고 황급하여 밤을 틈타 함양으로 도망쳐 굳게 성문을 잠근 채 스스로를 수비하면서 재빨리 임금님의 피난처에 장계를 올려 공을 반역자로 보고하였다. 또 비장(裨將)을 시켜 편지를 보내오되 ‘역적’이라고 하였다. 공은 행군 중에서 그 편지를 보고 대답하되 ‘의병이냐 역적이냐의 구분은 하늘과 땅이 알고 있을 것이다. 김수 무리는 말로써 논리가 통하지 아니 하거든 떳떳한 양심에 물어봄이 옳을 것이니라.’고 하였다. 문장의 기개가 엄숙 정당하여 병사들이 모두 전해가면서 외우기까지 했다.

그때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하여 공이 김수에게 보낸 격문을 보고 크게 놀랐다.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가 공을 바르고 착하게 여겨 공의 평생 지조와 행실을 김성일에게 아뢰었다. 김성일은 공이 본래 의리를 좋아하고 국난(國難)을 위해 죽음을 각오할 뿐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아니함을 듣고서야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격렬하여 일을 그릇되게 할까를 걱정한 나머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공을 안심시키는 일면 임금님에게 장계를 올려 전후 사리를 분변하여 보고하였다.

임금님께서는 그 소문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적군 토벌에 힘써주길 당부하는 일면 유곡 찰방과 형조 정랑 등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직책에 나가지는 않았다. 대개 공이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죄상을 헤아린 것은 비록 과격함의 잘못이 있긴 하지만 대란을 당하여 나라의 존망이 눈앞에 다가왔고 민심이 의지할 곳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만일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군중의 정서를 통일하고 대의를 바로잡지 못하여 장차 망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고, 김성일의 올바른 보고가 아니었다면 공은 역적으로 몰려 거의 위태로웠을 것이다.

여기서 김성일은 공에게 만나보기를 요청했고 공은 가서 만났다. 김성일은 공과 의견을 나누어 본 다음 크게 기특하게 여겨 함께 나라를 위해 죽기를 맹서하면서 의령은 다 공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에 공은 더욱 병사들을 가다듬어 경비하고 병사들을 사랑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다. 또 군기를 엄격하게 하여 비록 친한 사람이라도 특혜를 주지 않았으며, 상벌을 정확하게 함에 신의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도망 온 장수들이 공의 밑에서는 생각과 용기를 고쳤으며, 흩어진 졸병들이 공에게 돌아오면 다시 날 세어져[有明朝鮮國 贈資憲大夫兵曺判書兼知義禁府事 諡忠翼公行嘉善大夫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水軍節度使咸興府尹忘憂堂郭先生神道碑銘幷序 大提學 權愈撰

自古忠臣義士感憤發起興動事業多在於危難之時其誠忠義勇未遇亂而蓋素具矣惜不早擧以旃使厭未發而塞亂及鼓鐸之聲於耳而譎主規寵利之臣率敗僨奔逃國幾亡而後乃始起於表薄極身禦大亂而兵弧勢燥艱難危苦不得展所意緖有功矣而制於訾讆之人更相解故壓迮又不得自極於權衡而報亦不配後之志義之士所痛恨也 忘憂堂郭公之後孫具公行事請余隨道之文余讀其狀起而曰古與今一也此余所嘗感聳而悲歎而第願明著之後世焉者惟不能標揚義烈是懼敢辭諸公諱再祐字季綏玄風人也小而行篤厚事父母孝倜然有器度通物方達世務志慮弘深不斳苟見平居順鄕里與世偃仰若無所殊於人者至義所當出輒勇往無所顧守志堅嚴不傾奪於當世之操十四治春秋窮會經旨間從季父參議公赳問疑義參議公曰兒自通悟吾不足以發汝矣於是大覃思精微妙公之始終之爲所以本也又博觀兵書知大意往往習弓馬嘗從其父定庵公如燕有相工見公奇之曰後必名聞天下公屢中鄕解遣詣京輒屈叉擢庭試乙科以語觸時忌罷榜丙戌丁定庵公憂持喪一由禮側室在陜川病將死願一見公公終不見曰死乃告我其守禮多類此旣三年輟不赴擧家于宜寧之岐江上漁獵將老於此而已後四年壬辰倭亂起嶺南諸城邑及水陸師皆望風遁卒無一官臣能禦賊者賊肆侵軼直簿漢京 上西幸公憤曰爲人臣賊至不能禦坐令賊騰逼君父此屬可斬也於是散家財募壯士欲遂起其妾止之曰毋徒死公怒拔劍欲擊之不敢復言遂以其所以爲者告家廟率家僮十餘人及所募士首義拒擊賊自號天降紅衣將軍時賊渡海未及旬中外震撓民朝夕急靡所歸心公所將卒僅數百而賊勢熾兵不敵然公專以忠義激勵士卒而嚴軍律審禦機數數與賊戰所斬獲多民據公爲命義士益附時草溪守逃取其兵械宜寧潰而新反倉完運其粟以給軍軍勢稍振軍于砥山列卒江上下數十里遮遏賊令不得渡江西賊將安國司聲言欲向湖南引兵渡鼎津聞前有淖先使人竪木識渡兵處朝日將濟公去鼎津數十里諜知之夜拔木易置設蔚施伏以待之賊果至陷于淖多殪賊兵亂伏起衷擊大敗之而已賊並兵而至公選壯勇士十數及己皆紅衣白馬分遣所于地約曰若至質見賊送出爲風雨行令賊莫能勝偶身自大呼直前摩賊壘以誘之賊見公衣馬以爲必將也悉軍追之十餘里忽入林谷中賊莫知所之駐望頃又有紅衣白馬將鼓譟而出賊大驚追之已又失所在諸所遣疇騎更瓦出沒視爲不可測隱阨張旌旗令鼓角聲動林谷賊未委兵多少益驚疑以爲神不敢前伏弩邀擊多殺賊薄之江又敗之賊終不得渡鼎津當是時微公奮忠義用少擊衆右道列城幾皆陷始公之末起也聞巡察使金睟退駐草溪欲邀路斬之里中人交止之及起兵巡察使旣北踰嶺而都事金潁男代行事聽用公始有所規置巡察使師潰奔還公告于衆曰受命按一道遇賊不爲守戰計用故跳出境己又逃還其罪可斬遂移檄于金睟數八罪又列其罪聞于行朝歷諭諸義將將移兵擊之睟怖急夜遁咸陽閉城門自守疾馳啓行在指爲叛逆又令裨將移書謂之賊公在行見書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睟黨若不得於言求之於秉彛之良心可也辭氣嚴正士皆傳誦時鶴峯金公誠一爲招諭使見公檄大驚學諭朴思齊雅善公爲言公平生志行招諭使旣聞公素好義徇國難不爲身計說感歎久之恐激而事敗累貽書以平公馳啓言狀爲分之上聞甚奇之諭勉討賊拜幽谷察訪刑曺正郎以在兵所不卽職蓋公之所爲檄數睟者雖若失之激然當大難國之亡之日至矣而民心無所歸若不知是殆無以統羣情扶大義於將絶而非招諭使奏明之公幾危招諭使請見公公往見之招諭使與語大奇之約與之同死國宜寧縣悉屬公於是公益治兵儆備愛士卒令人盡其情軍政明肅犯者雖親無所貸賞罰必而信義著亡將得公而革思勇散卒歸公則銳欲前]"

좌측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먼저 무기를 들고 적군에게 나아가려고 하며, 조금도 미혹하여 패배할까를 의심함이 없었다. 공이 지시하는 바이면 장졸들이 모두 즐겁게 시행하여 감히 그 소임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무엇이거나 공의 일이면 누군들 가히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겠는고?’라고 하였다. 때문에 병사들이 비록 적었으나 승리할 기회가 많았다. 당시에 적군이 낙동강 왼쪽을 점령하여 방자하게 침략함에, 우리 인민들이 그들에게 붙잡히면 문득 길에서 찢어 죽임을 보이면서 위협하였다. 때문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몸 둘 바를 알지 못했다. 공은 의령에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현풍에 이르러 관산(鸛山)에 진을 치고 용사들로 하여금 달려가 적진을 살펴보게 하니 적들이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했다.

공은 다시 의병(疑兵)을 비슬산에 배치해 두고 밤에 횃불을 들고 북을 치면서 공격할 태세를 보이자 적군이 창고를 태워버리고 창녕으로 후퇴하였다. 기타 적들도 다 소문을 듣고 달아났다. 김성일은 또 삼가(三嘉)의 병사들을 공에게 귀속시키니 공은 세 고을의 군사를 함께 거느리고 각각 요새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공은 세간리(世干里)에 진을 치고 통솔했는데 계획 지시하고 책임자를 선발한 바 다 거기에 적당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다음 군사를 수련하여 오른쪽으로는 정호(鼎湖)를 안정시키고 왼쪽으로는 낙동강을 다스려 아래위 60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적군이 침범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보고가 들어오며, 보고가 들어오면 문득 재빨리 나가 공격 축출해 버리니 적군들이 감히 접근해 오지 못했다. 두 고을의 백성들은 공을 믿고 농사를 지어 곡식을 평소와 같이 수확하였고 부유한 집에서는 날마다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기도 하였다.

창원의 왜적이 군사를 합병하여 진주를 공격함에 공이 그 소문을 듣고 지름길로 달려와 성에 들어왔고, 초유사 김성일 역시 도착하여 여러 장수와 사졸들이 연합 공격하여 적군을 크게 패배시켰다. 왜적이 물러남에 김성일은 경상 좌도 순찰사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김충민(金忠敏)은 의령 현감으로 제수되었다. 그때 평양성이 무너지고 임금님께서는 신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으며 영남마저 기울어짐에 국가의 운명을 진작시킬 사람은 공과 같은 의병뿐이었다. 그런데도 초유사 김성일이 떠나버리면 의병은 중추 인물을 잃게 되며, 김충민은 일찍 성을 쌓음을 감독하는 데 원한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니 그 사람이 현감으로 오게 되면 공을 교란시킬 음모를 꾸밀까 두려운 일이었다. 김성일은 드디어 임금님에게 공이 세운 무공의 자초지종을 아뢰고 또 김충민을 현감으로 보냄으로 말미암아 의병들의 애국심을 저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남 우도 유생들도 소를 올려 김성일을 경상 우도에 머물게 하여 곽재우로 하여금 온 힘을 다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함에 조정은 그 의견을 따랐다.

김해와 부산 등지의 적군들이 창원에서 회합하여 병사가 수만이 되었으나 정암진을 건너지 못하고 바로 진주성을 공격하여 성이 거의 함락되어 갈 때, 공이 선봉장 심대승(沈大承)을 시켜 진주의 북쪽 산에 올라가 크게 외치면서 말하되 ‘홍의 장군이 호남 병사들과 더불어 지금 도착했다. 내일 양군이 연합하여 적병을 공격, 즉시 소탕해 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군이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던 차에 호남의 의병장이 살천(薩川)에 가기 위해 진주를 지나감에 적군이 그것을 보고 더욱 놀라 ‘밤에 산 위에서 외치는 내용은 믿을 만하다’고 하면서 막사와 시체를 불태워 버리고 도망감에 진주의 포위망이 해제되었다.

공은 소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분란(紛亂)을 당하여 크고 적은 전투에 임함에 반드시 우리의 명확한 기법(奇法)을 말하면서도 대개 뜻하지 못했던 전법을 구사하였다. 이에 적군들은 공을 두려워하여 ‘홍의 장군’이라고 하면서 공의 병사와 전투만 하면 패배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공은 의병을 일으키던 초기부터 휘하의 장병들에게 경계하되 ‘신하된 사람이 나라를 위해 적군을 토벌한 다음 죽은 적군의 머리수를 헤아려 전공을 나타냄은 의리상 금할 수 없는 일이로되 죽은 시체의 머리를 베어와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임금님께서 그 말을 듣고 교지를 내려 사민(士民)들에게 이르시되 ‘듣건대 곽재우는 군사를 포진하고 조치함이 특별하다. 적군을 많이 죽이고도 적군의 머리를 베어 올리지 아니하니 나는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 그 이름을 들음이 늦었음을 한스럽게 여기노라’고 하였다. 얼마 뒤 절충장군으로 특별 승진, 조방장에 제수되었다.

계사년 여름 서울이 수복되자 적군이 남쪽으로 달려가 다시 진양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적군의 추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성을 내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총동원하여 진양(晉陽)을 포위하게 하였다. 이때 아군의 여러 장수들이 남강을 건너가 적을 맞아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공은 ‘우리의 병사들은 훈련된 병사가 아니며 적군의 병사들은 강성하니 가볍게 대항할 수 없다’고 하면서 완고히 듣지 아니했다. 몇몇 장수들은 강을 건너갔다가 적에게 패배하고 돌아옴에 진양이 드디어 함락되었으나 공의 군사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성패에 대한 계책을 명확하게 살핌이 이와 같았다.

그 해 겨울에 성주 목사 겸 조방장에 임명되어 성 쌓는 일을 관장했다. 갑오년에는 호남 지방의 충용(忠勇)한 장군 김덕령(金德齡)이 공의 충의(忠義)를 듣고 먼저 편지를 보내와 상호 협력하여 왜란을 방어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얼마 뒤 병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회합하였다. 가을에는 성주를 떠나 의병 대장으로서 의령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때 적군이 후퇴하여 해상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틈타 성을 점거하려고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여러 용감한 장군들이 다 공의 군영(軍營)으로 달려옴에 공이 이광악(李光岳)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김덕령을[臨敵擧機無感疑匱惟公之所指使士皆樂爲用莫敢轉其力曰孰是公也而可無投死乎以此兵雖少而勝權常多時賊磐牙江左恣侵掠我人爲賊得輒膊諸路威我也民聳懼不知所庇公從宜寧帥兵至玄風耀兵于觀山令勇士馳嘗賊屯賊懼不敢出公益張疑兵于毘瑟山夜擧火擊鼓以勢攻賊恐焚倉遁昌寧賊亦望風走招諭使又命三嘉兵盡屬公公幷領三縣兵令分守要害公軍于世干以統之所計畫指授選昇任者皆得其人軍士修右撫鼎湖左規洛江上下六十里發斥不或遺賊欲犯必先聞聞輒疾趣擊逐之賊莫敢近二縣民恃公卽農禾穀如平日富戶皆日擊牛餉軍昌原賊並兵攻晉州公聞儳道馳入城招諭使亦至諸將士戰益力合軍迎擊大敗之賊遁會招諭使移拜左道巡察使金忠敏拜宜寧監時平壤潰 上益西幸義州嶺南所傾湊庶幾振國命者惟公等義兵而招諭使去則義兵失所主忠敏嘗監築城多怨來恐謨撓公招諭使遂奏言武功終始且請勿令忠敏監縣沮義軍心江右儒生又上䟽請留金公于右道使郭再祐得畢輸力朝廷從之金海釜山諸屯賊會于昌原兵數萬不得渡鼎湖直攻圍晉州城幾陷公令先鋒將沈大承登州北山大呼曰紅衣將軍與湖南兵今至矣明日合擊賊兵立盡賊閒之懼會湖南義兵將赴薩川過州賊見益驚謂野呼山者信焚幕燒戶騰踐遁去晉州圍解公提弧軍觸紛亂大小戰必道吾所明奇擧出不意賊畏之謂紅衣將當輒奔潰然公自初起兵戒麾下曰人臣爲國討賊效首虜邀功義不可禁不得斬馘 上聞之下敎諭士民曰聞郭再祐布置異常多殺敵而不獻級予尤奇之恨聞名晩也已而特陞折衝階拜助防將癸巳夏京城復賊南走以嘗再攻晉陽再敗賊酋怒令行長淸正等悉衆圍晉陽我諸將議渡江迎擊賦公曰我兵非鍊士賊兵盛不可輕固止之不聽師渡江見賊漬還晉陽竟陷公軍終不動其計策成敗明審如此冬拜星州牧兼助防將管築城事甲午湖南忠勇將軍金德齡聞公忠義先致書請與協心禦亂有頃帥兵來會秋棄星州以義兵大將駐宜寧時賊退屯海上窺候便隙據城久不去而諸勇將皆來赴公軍於是公以李光岳爲副將金德齡]"

후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비장(飛將), 홍계남(洪季男)을 효장(驍將)이라 하여 좌우영(左右營)에 배치한 뒤 공은 직접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동래로 나아가 하루는 날래고 용감한 기병들로 하여금 출동하여 도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적군은 아군의 장군이 용감하고 병사들이 사나움을 보고 두려워하여 굳게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수군(水軍)을 나누어 거느리고 북을 울리면서 적군의 성을 진격했으나 적군들은 화포를 사용하여 스스로를 수비하면서 감히 응전하지 못했다. 공은 드디어 군량과 병기가 보급되지 아니함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을미년 봄, 공은 진주 목사로 제수되었으나 그 해 가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여러 군사를 연합하여 일전(一戰)을 벌이기를 주장함과 아울러 명나라 원군인 총병(總兵) 양원(楊元)의 군사들을 영남 지방으로 옮겨오도록 요청하려고 하였다. 그때 양 총병은 남원에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공은 말하되 '진실로 왜적의 침입을 잠시 정지시키는 사이에 우리의 공격력과 수비력을 더욱 강화하여 적당한 때가 돌아옴을 기다림이 옳을 것입니다. 아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일전을 벌이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중국의 원군이 호남에 주둔하고 있음은 아군의 성세(聲勢)를 위함이니, 만일 호남의 중국 원군을 영남으로 이동시키면 원군의 실정은 들어나고 형세는 약화될 것이니 원컨대 공은 이 계획을 철회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원익은 크게 깨달아 그 계획을 중지시켰다.

정유년 가을 공은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석문산성을 쌓다가 완성하지 못한 즈음 왜적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화왕산성으로 이동하여 수비하려 했는데 성에 들어가자마자 적군이 이미 도착했다. 공은 성을 둘러보며 경계 수비, 군령을 내려 땔감을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에 쌓도록 하여 병사들에게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살기를 도모할 마음이 없음을 보여줌에 병사들이 다투어 용기를 내었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전군을 거느리고 성에 접근함에 공은 더욱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의기자약(意氣自若)하였다. 적군이 성을 지킴이 굳세고 엄격함을 보고는 침범하지 못해 전쟁을 포기하고 가버렸다. 그러나 호남과 영남 지방의 여러 성이 적군에게 함락되었으니 이때에 공의 무력적인 수비가 아니었다면 낙동강 오른쪽 4·5현도 안전할 수가 없었다.

체찰사 이원익이 성은 외롭고 병사는 적다는 이유로 공에게 병사들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공은 그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굳게 지킬 계획을 세웠다. 그 무렵 공이 계모의 상을 당해 부득이 떠나니 군인들과 백성들이 모두 개탄해 마지않았다. 공은 드디어 울진으로 들어가 떠돌아다니니 곤궁하고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상례를 치름을 더욱 근엄하게 하였다. 스스로 패랭이를 만들어 팔아 의식을 이어나감에 주민들은 공이 거주하고 있는 곳을 방어사점(防禦使店)이라고 불렀다.

임금님께서 공이 상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도 특별히 나와 출사하도록 명령했으나 소를 올려 사직하고 나가지 아니했다. 무릇 세 번이나 명령을 내렸으나 끝내 일어나지 아니하다가 그 이듬해 왜적이 바다를 건너가고 나라가 안정되었으며 기해년에는 상례도 마침에 경상 좌병사로 제수하였다. 공은 교화와 정치를 엄격하고 명확하게 하였으니 장수들과 이속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처음 왜적이 바닷가에 진을 쳤을 때 도산(島山)에 성을 쌓아 진격 후퇴의 대비처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공은 도산성을 증축 수리하여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 할 요새로 여겼으며 또 불의의 사변을 방어하기 위해 진실로 그 수축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스스로 직책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으며 조정 대신들의 붕당에 관한 상황을 극론하였다. 또 ‘영의정 이원익은 충성스럽고 청렴하고 삼가는 사직 신하인데도 그로 하여금 조정에서 편안하게 일을 하지 못하게 하면 나라가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또 ‘전하께서는 저를 어부로 여기시어 벼슬로써 구속하시지 마옵소서. 강호의 한 어부가 비록 나라에 아무 이익이 없으나 지금 당을 빙자하여 자신의 벼슬이나 얻으며 국가의 존망을 잊어버리는 자들보다는 차이가 있사옵니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벼슬자리를 사직하고 떠나버렸다. 대사헌 홍여순(洪汝諄) 등이 이것을 이유로 공을 탄핵하여, 영암에 유배된 지 1년 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그 뒤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먹지 않고 속세의 일을 사절, 영산(靈山)의 창암(滄巖)에 정자를 짓고 살면서 자신의 호를 망우당이라 불렀다.

거기서 3년을 지난 뒤, 찰리사(察理使)로 제수하여 영남을 보장(保障)하라고 함에 공은 남쪽 여러 성을 둘러본 바 오직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이 험고(險固)하여 수비할 만하기에 석성(石城)을 증축하였다. 그 뒤 선산 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찰리사마저도 사임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다시 안동 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가선대부의 품계로 승진하였고, 을사년 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제수하고 명령을 내려 부르심에 서울에 도착하자 한성부 우윤을 제수했으나 곧 병을 일컬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동 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한 3년 뒤 무신년에 선조께서 승하하시고, 광해군이 다시 공을 경상 좌도 병사로 제수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명령하여 불렀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공이 매우 가난하여 생활을 꾸려 나감이 어렵게 되자 임금님은 경상 감사에게 명령, 의복과 말을 갖추어 보내왔음에 공은 소를 올려 그 은혜로운 명령을 되돌려 주기를 간청했으며, 『춘추』의 적을 토벌하는 대의를 인용, 임해군을 죽일 것을 요청했다. 그 다음해 통제사(統制使)로 제수되었으나 병을 일컬어 부임하지 않았다. 경술년에도 임금님의 부르심이 있었으나 소를 올려 사절했으며, 인하여 「중흥 삼책소(中興三策疏)」를 올렸는데, 그 첫째는 ‘주승지도(主勝之道)’, 둘째는 ‘병승지모(兵勝之謀)’, 셋째는 ‘근보지계(謹保之計)’를 논했다. 그 말이 매우 위엄스러워 여러 대신들이 능히 말하지 못할 바이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국가의 성공과 패배는 장기나 바둑의 원리와 같은 것이라, 비록 패배의 국면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엔 승리의 기세가 없는 것이 아니며, 비록 승리의 국면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엔 패배의 형세가 없지 아니한 것이니 오늘날의 형세는 비록 패배의 국면에 처해 있으나 어찌 거기에 승리의 기세가 깃들어 있지 않겠사옵니까? 평범한 일상의 정치로서는 아마도 오늘날의 위급한 형세를 구제하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특단의 은혜와 위엄을 사용한 다음에야 붕당(朋黨)을 없애고 탐관폭리(貪官暴吏)들의 폐해를 척결함으로써 대소신료(大小臣僚)들로 하여금 능히 협심하여 국가 일을 도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본과 청나라의 적군들은 두려워할 바가 못될 것이옵니다.’

여기에 대해 광해군은 다만 우대하는 회답만 내렸다. 여름에 또 공을 서울로 불러들임에 도착하여 사은숙배를 드리니 부총관을 제수하였다. 당시에 김수(金晬)도 도총부에 있었는데 보검(寶劒)을 점검할 때마다 김수는 공에게 ‘공은 곡식 음식을 먹지 아니한 지 오래되었으니 어찌 능히 무거운 보검을 들어 만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늘 공을 대신하여 보검을 둘러메었으니 진실로 의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 해 가을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을 때 광해군이 무도하게도 사치스러운 궁궐을 짓기 위해 수만금의 비용을 들였으나 충성으로 직간하는 자는 배척을 당하였기 때문에 언로가 막혔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우리를 대함이 무례하여 광해군이 몸소 연회를 베풀려고 했으나 불허, 도리어 백금(白金) 수만 량의 뇌물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통역을 맡은 통사(通事)들은 사리(私利)를 도모하기 위해 그 원인을 제공했으며,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들마저도 정정당당하지 못하였다.

공은 소를 올려 직언논척(直言論斥), 거리낌 없이 통사들의 목을 베고 원접사들을 유배시키라고 하였다. 또 선혜법(宣惠法)을 시행하여 환관·비첩 등 측근의 말에 동요하지 말고 군율을 펴고 탐관오리와 살인에 대한 법을 엄격히 밝히라고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이 건의를 비변사에 내려 보내어 논의하라고 했으며, 비변사에서도 훌륭한 말이라고 회답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다. 함경도 감사로 제수되었으나 공은 자신의 언론이 수용되지 아니함을 이유로 결연히 일어나 남쪽으로 돌아와 버렸다. 광해군은 선전관을 충주까지 따라 보내어 돌아와 주기를 명령했으며, 또 주서(注書)를 가야(伽倻)까지 보내어 만류했으나 신병(身病)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소를 올려 광해군의 게으르고 무기력함을 경계하고 또 ‘신은 많이 미움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 떠나지 아니하면 두려움이 미칠 것이오니, 그 화를 입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산중에서 병들어 죽겠사옵니다. 신이 가자마자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깊어질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계축년 여름에 전라도 병사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여러 번 목사, 수령, 순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다 부임하지 않았으며 간혹 잠시 부임했다가도 즉시 버리고 돌아가 한 번도 오래 직책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러나 늘 ‘만일 사변이나 위급함을 당하면 내 마땅히 그 어려움에 나가 감히 살기를 도모하기 위해 나라를 배반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그때 간신들이 광해군의 뜻을 부추겨 영창 대군을 살해하려 했으나 아무도 그 그릇됨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은 소를 올려 ‘8세의 아이가 절대로 역적질할 이치가 없습니다. 지금 저 영창 대군을 왕후의 품에서 빼앗아 죽이게 되면 신은 생각하건대 군신들이 전하를 큰 불의(不義)에 빠뜨리는 결과가 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소가 전달되자 광해군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 4년 뒤에 판결사(判決事)로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정사년 4월에 병이 위독하자 자제들에게 ‘임진왜란으로 인해 선왕의 두 능은 무너지고 다섯 묘우(廟宇)가 불타버렸음은 신하된 자의 부끄러움이로다. 나의 장례는 상례를 갖추지도 말고 묘의 봉분은 겨우 흙이 덮일 정도에서 그치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 달 10일 창암강사(滄巖江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연세는 66세였다. 부음을 들은 백성들은 공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광해군은 제사를 드릴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사관(史館)에 명하여 전(傳)을 쓰라고 하였다. 8월에 현풍 남쪽 구지산(仇知山) 신당(神堂) 선산에 장례를 치렀다.

공의 기풍과 성격은 확 트이고 쇄락하며, 재간과 책략은 뛰어났다. 『춘추』를 체득하여 기질을 이룸에 의리에 밝고 사리에 조리가 있었으며, 병법에 대한 규모와 생각은 범상한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으며, 주소(奏疏)에서 계획한 바는 다 속세의 선비들과 논할 수 없는 뛰어난 내용들이었다. 돌아보건대 무엇이건 그릇되게 구하거나 시세와 타협하지 아니하였다. 국난을 당해 공에게 일면을 위촉했더라면 명나라에 원군을 기다라지 아니하고도 적군을 물리쳤을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이 이미 시험한 일뿐만이 아니라, 적군이 물러난 뒤에도 공에게 나라의 정치를 위촉했다면 반드시 능히 큰일을 이루고 나라의 운명을 떨칠 수 있었으나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홀로 일어나 남은 성을 수습하여 왜구들을 제압하며 시종 여러 성을 완전하게 수비, 조야(朝野)의 마음을 부지시켜 중흥대업의 기반을 이루었으니 그 공로는 국가의 대군을 이끌고 전쟁하여 승리함보다 더 큰 것이었다. 비록 수군과 육군의 처한 바가 다르나 충무공 이순신과 더불어 동등한 공훈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로가 동등한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공훈을 봉함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음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號飛將洪季男赤驍將使爲左右營公自將直趨束莢日令輕勇騎出挑戰賊見將勇士厲懼堅入保不出分帥舟師鳴鼓薄城下賊用火砲自衛終不敢出以糧械不給引軍而還乙未春拜晉州牧秋棄歸體察使李公元翼議欲合諸軍一戰又將請楊總兵元移軍嶺南時摠兵在南原公曰姑且羈縻益修吾攻守之備以待時之反可也若不量力而偷壹非計也天將在湖爲我之聲勢大若移軍恐情見勢損願公釋此計體察使悟乃止丁酉秋公爲防禦使築石門城未訖功聞賊至移守火旺旣入城而賊銳已到公巡城儆守申軍令積薪于所止舍示士必死無生心士爭奮已而敵將淸正悉衆至城下公益治軍意氣自若賊見城守堅嚴不可犯不戰而去而湖嶺諸城多爲賊所陷當是時非公之有武守江右四五縣赤不能全體察使以城弧兵少令公解兵公不從爲固守計會遭繼母憂去軍民慨恨公遂入蔚珍流離困悴甚然持喪益謹自造蔽陽子逮給食民號公居爲防禦店 上聞公遭憂特命起復從軍上䟽辭不起凡三有命終不起其明年賊波海去國定己亥制除拜慶尙左兵使風政嚴明將吏畏服始倭之屯海旁也城島山爲進退之備公欲增修島山以爲吾必守地以禦不虞固以請朝廷不許公自以不得職上䟽乞解固極論朝臣朋黨狀又言領議政李元翼忠誠廉謹社稷臣也使不得安於朝廷國將若之何又曰願 上視臣爲漁父勿縛以爵江湖一漁父雖無益於國視今之引黨封己忘國家之存亡者赤有間矣遂棄官去臺臣洪汝諪等搆劾之付處靈巖三年赦還入琵瑟山辟穀謝人事尋築亭于靈山滄岩而居之號忘憂堂居三年拜察理使屬南路保障公歷巡南邊諸城惟仁同之天生城險固可守增築石城而已拜善山府使辭不赴又乞解察理使不許俄拜安東府使辭不赴尋陞嘉善階乙巳春拜同知中樞事而已召至京移拜漢城右尹有頃謝病歸拜仁同府使辭不赴三年戊申宣廟薨光海拜公慶尙左兵使不赴命召文辭不就其秋以公貧甚難辦裝命監司具衣馬護送公上䟽乞還恩命又引春秋討賊之義請誅臨海其明年拜統制使病不赴庚戌有召命公上䟽辭謝因上中興三策其一主勝之道二兵勝之謀三僅保之計其言甚偉非衆臣所能道也又言國家成敗若奕碁雖敗局未嘗無勝勢雖勝局未嘗無敗勢惟今之勢雖敗局然豈無可勝之勢哉平常之政恐不救今日危急之勢必用非常不測之恩威然後可以去朋黨革貧暴使大少臣得協心圖王事而南北寇不足憂也光海但優答之夏又命召公入京謝拜副總管時金睟亦在摠府每實劒點

下睟謂公曰公絶粒久惡能任實劒常代公荷劒無恨意覺於義也秋拜左尹時光海無道治宮室侈功費萬計忠諫者輒斥言路塞皇朝使來遇我無禮光海躬請宴不許索賂白金可累萬數而直事譯營私利助匿事端儐臣不擧正公上䟽直斥言無所顧諱請斬直事譯鼠儐臣等又請行宣惠法勿撓於宦妾私昵之言又請申軍律嚴明贓汚殺人法光海下備邊議備邊覆奏陽浮言然不能用拜咸鏡監司公以言不用決起南歸光海遣宣傳官追至忠州諭令還又遣注書追至伽倻宣旨固病不就上䟽戒逸豫又曰臣多見疾惡不去則懼及與其受禍死寧枯死山中且言臣一去山益高而水益深癸丑夏拜全羅兵使不赴公屢拜牧守巡節使皆不赴問嘗暫赴輒卽棄去未嘗久於職然嘗曰若遇變急吾當赴難不敢偷生以負國時陰臣襲光海意將殺永昌大君人恐懼莫敢言公上䟽言八歲兒斷無逆理今欲取諸 慈殿懷中而殺之臣恐羣臣陷殿下於大不義也疏入光海不悅後四年拜判決事不就丁巳四月遇疾遺言于子弟曰龍蛇之變 先王二陵夷五廟火臣子之恥也吾葬不用成禮僅過土之平而止十日卒于江舍壽六十六百姓聞公卒知不知莫不流涕光海賜祭賻命立傳付史館秋八月葬于縣南仇知山新塘原公風性廓落幹略絶人輔之以學遂登其質明於義此於事兵陣所規慮皆不可以常知觀奏疏所計畫皆不可與俗士論顧第不委曲求協時耳若方難而屬公一面不待乞皇靈而足以捍寇敵不寧是所已試者而已寇退而屬公邦治必能贊大事振國命乃猶可以戾不惟不爾其孤起拾餘燼而威壓寇終始完守數城以持中外心以塞中興之業者其功大於擁國兵而一戰勝者雖水陸所處異可與李公舜臣等勳而功末列上勳封摥不逮斯亦未可論也]“

우측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하지만 행동과 의리는 사민(士民)들에게 믿음을 주었으며 충성과 정직함은 조정을 움직였다. 일찍이 서울에 들어감에 서울 사람들이 공의 상경 소식을 듣고 친한 친구가 왔음을 들은 것처럼 온 시민이 다 나와 바라보았다. 정승 이원익과 이덕형은 매일 방문했으며, 조정의 여러 명경현대부(名卿賢大夫)들이 가서 인사드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음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레와 말이 대문과 거리에 즐비하였다. 돌아와 창암강사에 기거할 때는 영남의 제현들이 원근을 막론하고 다 공과 교유함을 즐거워하였다.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에까지 공에 관한 내용을 출제했으며, 왜적들은 공의 지혜와 용기를 두려워하고 감복하여 일본 역사에도 공의 공적을 기록하였으니 공은 실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것이다.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가 장생술(長生術)을 배우니 저 한(漢)나라 건국 공신 장양(張良)의 뜻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현풍 곽씨는 고려 시대 금오위 교위(金吾衛校尉) 곽자의(郭子儀)의 후손들이다. 증조 휘 위(瑋)는 현감(縣監)이며, 조(祖) 휘 지번(之藩)은 사성(司成)으로 증승지(贈承旨)였으며, 고(考) 휘(諱) 월(越)은 감사(監司)로 증판서(贈判書)였으며, 비(妣) 정부인(貞夫人) 진주 강씨는 증목사(贈牧使)인 강응두(姜應斗)의 따님이시며, 배(配) 상산 김씨는 만호(萬戶) 휘(諱) 행(行)의 따님이요 조남명(曺南冥)의 외손녀였다. 공은 5남 3녀를 두셨으니 형(瀅)·활(活)과 탄(灘)·명(溟)·목(沐) 등이며, 장녀는 신응(辛膺)에게, 차녀는 진사(進士)인 성이도(成以道)에게, 측실의 딸은 박임(朴{王+任})에게 출가했다. 형(瀅)은 여로(汝櫓)·여즙(汝楫)과 여제(汝梯)·여절(汝梲) 두 아들 및 이사술(李思述)에게 출가한 딸이 있었다. 그리고 활(活)은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에 여환(汝桓)·여재(汝梓)·여추(汝樞)·여송(汝松)이며, 장녀는 서징(徐澄)에게, 차녀는 이시삼(李始三)에게 출가했다. 이외에도 많은 내외 증현손(曾玄孫)이 있었다.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공은 해동에서 태어났으나 천하의 선비가 되었으니, 의리는 학문에서 체득하고 용기는 진리에서 배웠었네. 남몰래 시골에서 할 일 없이 지내시더니, 시대의 어려움을 당하자 무궁한 지혜를 발휘했도다. 민족 혼을 떨쳐 일으킴에 기절과 의지는 높이 빛났으며, 필부로서 높이 외침에 나라에 간성이 되기를 바랐도다. 힘써 나라 한 모퉁이를 보존하자 명성은 천하를 움직였으나, 과격한 논의는 미움을 받아 비방과 중상을 입었도다. 혹 일의 기미를 분변치 못한 적이 있었으나, 함정에 빠지거나 넘어지지 아니했으며, 공로는 특수함을 들어내지 않았으니, 그 누구도 공의 마음 씀씀이와 품은 포부를 따져볼 수 없도다. 무인의 사상에서 우러난 큰 도량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함께 할 바가 아니었으며, 명리를 떨쳐버렸으나 생명에 위험이 닥쳐올 상소문을 쓰기도 했네. 강대한 적군을 평정하여 자신의 뜻을 펼쳤으나, 물외(物外)에 노닐어 위대한 몸을 양생술로 수련했도다. 세상에서는 대개 공의 무공만 흠복(欽服)했을 뿐 학문에 뜻 두었음이 지극함을 알지 못했도다. 그런 내용을 써서 비석에 새기나니, 이로써 저승에 계시는 공은 이승에 있는 나의 존경심을 이해하실 것이로다[然行義信於士民忠直動朝廷嘗入京漢京人閒公如聞古人所至市道皆聚觀之完平李相國元翼漢陰李相國德馨訪候日相繼朝中諸名卿顯大夫無不造求見車馬溢門巷及居江上嶺南諸賢不問居遠近皆樂從公遊皇朝策士擧公爲問倭畏服公智勇日本史頗錄公蹟公於是立名天下矣晩而入山學長生非留侯意耶玄風高麗金吾衛校尉子儀之世也曾祖諱瑋縣監祖諱之藩司成贈承旨考諱越監司 贈判書妣貞夫人晉州姜氏贈牧使應斗之女也公配商山金氏萬戶諱行之女曺南冥之外孫也生二男二女長瀅次活女長適辛膺次適成以道進士再室三男一女男灘溟沐女適朴{王+任}瀅有二男一女男汝櫓汝楫女適李思述再室二男汝梯汝棁活有四男二女男汝桓汝梓汝樞汝松女適徐澄次適李始三內外曾玄男女略干人銘曰

公生海東天下之士義得之學勇訓于理伏處下縣若無所事會時之難奮不原之智鼓動振厲氣意跳章匹夫高叫而望有墻力存一隅聲翕四方激議致憎職競謗傷靡或端辦不陷不僵功不見殊若以卽公意用不究所有赤未窮武思大度之言世所共非間且臥名利而寫生患助平巨寇我志畧申遊求人外以役偉身世盖服公之武不知志業攸極序銘于石尙參是以該得]"

[의의와 평가]

곽재우 신도비곽재우의 생애와 의병장으로서의 활약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예연 서원과 함께 곽재우의 나라 사랑을 알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22 행정지명 현행화 유가면에서 유가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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