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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629
한자 郭越 神道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17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곽월 신도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18년 - 곽월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86년 - 곽월 사망
현 소재지 곽월 신도비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178지도보기
원소재지 곽월 신도비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138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관련 인물 곽월
재질 석재
크기(높이) 비좌 30㎝[높이]|76㎝[길이]|46㎝[너비], 비신 124㎝[높이]|53㎝[너비]|16㎝[두께], 개석 51㎝[높이]|77㎝[길이]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곽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

[개설]

곽월(郭越)[1518~1586]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정(時靜), 호는 정재(定齋)이며, 의병장 곽재우의 아버지이다. 1546년(명종 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5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조 참의, 청송 부사, 남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곽월 신도비(郭越神道碑)는 1635년(인조 13)에 세웠으며 현풍 현감을 지낸 이조 참판 김세렴(金世濂)이 비명을 지었다.

[위치와 현황]

곽월 신도비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178번지에 위치한다. 달성군구지면 사무소를 지나 남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에 현풍 곽씨 묘역이 나타난다. 이 묘역의 주차 공간 북쪽에 신도비가 위치한다. 처음 곽월 신도비는 현 위치에서 동남쪽 300m쯤 떨어진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138번지에 있었다고 한다. 신도비의 뒤쪽으로는 현풍 곽씨 묘들이 유존하고 있으며, 곽월의 묘와 곽재우의 묘도 함께 있다. 곽월 신도비는 비교적 형태는 온전하나 비문은 마멸이 심해 육안으로는 거의 확인이 되지 않는 상태이다. 이에 2000년 국한문 혼용으로 만든 새 신도비를 구 신도비의 우측에 나란히 두었다.

[형태]

비좌 위에 비신과 하엽형(荷葉形)의 개석을 올렸다. 특히 비좌의 사면과 위쪽에는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규모는 비좌 높이 30㎝, 길이 76㎝, 너비 46㎝이고, 비신 높이 124㎝, 너비 53㎝, 두께 16㎝이며, 개석 높이 51㎝, 길이 77㎝이다.

[금석문]

곽월 신도비는 비문의 마멸이 심하여 한국 고전 번역원 제공 『동명 선생집』 내 곽월 신도비명을 전재하였다.

“통정대부 수황해도 관찰사 증예조 판서 곽공 신도비 명 병서

곽씨는 대대로 명망 있는 가문으로서 고려대에 널리 알려졌다. 국조[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경(瓊)이 있었는데 관직은 영천 지사(永川知事)에 이르렀다. 2대에 이르러 익산 군수 휘 안방(安邦)은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으며 경사를 쌓아 복을 열어 능히 대업으로써 창성하였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그의 아들은 휘 승화(承華)로서 성균관 진사였으며, 손자는 휘 위(瑋)로서 예안 현감을 지냈다. 이 분이 휘 지번(之藩)을 낳았으니 성균관 사성(司成)을 지냈으며,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동지사 허린의 여식과 혼인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니 공은 그 중자(仲子)이다.

공의 휘는 월(越)이요, 자는 시정(時靜)이다. 태어나 6세 때에 선부인께서 세상을 떠나심에 외가에서 길러졌다. 어려서는 몸가짐이 진중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과거 공부를 하였다. 병오년[154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가정 병진년[1556년]에 별시 문과에 등과하여 승문원 정자에 발탁되었다. 경신년[1560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갑자년[1564년]에 대동 찰방으로 나갔으며, 병인년[1566년]에는 영천 군수에 올랐으며, 4년을 지낸 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 후 대구 부사, 상주 목사, 성주 목사 등 여러 번에 걸쳐 서임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신미년[1571년]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장령으로 옮겼고, 다시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74년]에는 의주 목사에 발탁되었으며 통정대부에 올랐다. 정축년[1577년]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무인년[1578년]에는 동지사로 명나라에 가셨다가 기묘년[1579년]에 돌아와서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신사년[1581년]에 제주 목사에 제수되었는데 대신들이 공은 이미 연로한데다 제주도는 절해 고도라고 주청하여 청송 부사로 바뀌었다. 을유년[1585년]에 남원 부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현풍 솔례촌의 자택에서 돌아가셨으니 때는 선조 19년[1586년] 병술 8월이며, 향년 69세였다. 구지산 신당리 선영 아래에 묻혔다.

공이 대동 찰방이었을 때 윤원형이 척신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믿고 으스대기를 심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마치 징그러운 벌레 보듯 하였다. 종이 도포를 입고 신을 신은 채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는 공이 노하여 매질을 하였더니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영천 군수가 되어서는 아래 사람들을 다루기를 엄격히 하였으나 또한 가혹하거나 급하게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롭거나 헐벗은 사람에게는 측은한 정을 더욱 극진히 하였다.

나라에서는 법으로 어사를 특별히 파견하여 주현의 공문서를 뒤져서 불법이 드러나면 죄를 조정에 보고하여 때로는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호행(虎行)이라고 불렀다. 공이 하루는 당 위에 앉아 공사를 듣고 있는데 어사 윤근수(尹根壽)가 갑자기 들이닥쳤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윤 공이 그 그릇에 감복하여 극찬하여 말하기를 “내가 암행하여 주현을 살핀 적이 많았지만 일처리가 조용하기를 이 사람같이 하는 예를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때 조세를 내지 못하는 수령이 한 해 만 석이나 되어 백성들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는데, 공이 문서를 불사르고 모곡(耗穀)으로 보충하자 관리와 백성이 모두 손뼉치고 춤추며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임(離任)하고 떠날 때에 이르러 공이 만류하였으나 불가하였으므로 비석을 세워 그 뜻을 담아 길이 남게 하였다. 말에 있어서는 높은 산과 같이 스스로를 다스렸지만 그 논핵함은 피할 수 없었으니 이로써 이름이 더욱 높아졌다.

당초 의주(義州)는 벽지여서 백성들이 교화를 알지 못하였는데 공이 교칙을 세우고 학교를 개설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으므로 백성들이 흥학비(興學碑)를 세워 보답하였다. 그가 남원에 있을 때에 방백이 남원부에 이르러 창기로 하여금 따르게 하였다. 공이 노하여 “이것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부가 비록 폐퇴하고 방백이 존귀할지라도 어찌 창기를 끼고 내가 있는 부를 지나갈 수 있는가”하고 기생의 음식은 준비하지 않았다. 방백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허위로 하등의 고과(考課)를 상신하였으므로 파직되어 돌아왔다.

공은 높은 기개를 지녔고 외모가 크고 호걸스러웠으며, 눈빛이 남달랐으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두려워하였다. 일처리에 뛰어나서 판단이 마치 물 흐르듯 하였고, 일처리에 임하여서는 품은 뜻이 컸으므로 관례대로 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을 다스리기를 또한 준엄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여 여러 군읍을 20여 년이나 거쳤지만 논과 밭, 집이 늘어난 것이 없었고 자손의 장래를 위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 들어가서는 의심 받을 일이 없었으며, 향촌에 처하여서는 말썽이 생기지 않았다.

공이 지은 문장은 넓고 웅건하였으며 세속적인 기질이 없어 향촌에서 추천을 받은 것이 12번이고, 상위에 든 것이 8번이었으니 한 때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활을 잘 쏘는 것도 또한 공의 천성이었다. 공무에서 물러나면 곧 과녁을 걸고 활을 당겼는데 명중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공이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여 나라가 평온할 때나 위급할 때 모두 큰일을 할 것이라 입을 모았다. 뒷날 공의 아들 재우가 민간으로서 일어나 왜적을 격퇴하고, 임진·계사 연간에 큰 공을 세워 이름이 천하에 드러남에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였다. 재우가 귀하게 됨에 따라 공에게는 자헌대부 겸 예조 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사 세자 좌빈객이 추증되었다.

공은 두 번 혼인하였는데, 첫 번째 부인은 진주 강씨로 목사로 추증된 휘 응두(應斗)의 따님이며, 두 번째 부인은 김해 허씨인데 참봉 휘 경(瓊)의 따님이었다. 공보다 12년 후에 돌아가셨는데, 장례는 고례에 따라 첫째 부인 강씨와 합장하였고, 허씨 부인은 묘의 좌측에 장사지냈다. 자녀는 7명의 아들딸을 두었다. 장자는 재희, 다음은 재록, 다음은 재우 즉 망우당이며, 여식은 허언심(許彦深)과 혼인하였는데 이상은 강씨 소생이다. 다음은 재지, 다음은 재기이고, 여식은 성천조(成天祚)와 혼인하였는데 이상은 허씨 소생이다. 재희는 고성 최씨와 혼인하여 한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원(源)이다. 재록은 함안 조씨와 혼인하여 세 아들을 두었는데 풍·옹·창후이다. 재우는 상주 김씨와 혼인하였으니 남명 선생의 외손녀이다.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형·활·탄·명·목이다. 재지는 창녕 성씨와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으니 동·간·하·한이다. 재기는 영산 신씨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니 유는 생원이었고, 융은 저작으로 정묘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내외손으로 증손·현손이 거의 2백 명에 달하였다.

공의 아들 재기가 하루는 나에게 명(銘)을 청하여 말하기를 ‘일의 내막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선대부께서 세상을 버리신 지 이미 49년이 흘렀습니다. 선대부께서 명신이었고 망우당과 같은 자식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글이 없습니다. 만약 명이라도 지어 비석에 새긴다면 그것으로 위로가 될 것입니다. 비록 49년이나 늦게 하게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대를 만났으니 그대가 뜻을 세운다면 선대부께서는 비록 돌아가시긴 했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예부터 공의 부자와의 관계가 두터웠는데 그의 입으로 이러한 청을 한 것이라 감히 사양하겠는가? 명(銘을) 하노니,

곽씨의 선대는 대대로 덕을 베풀었으니 근원은 커서 마르지 아니하고 뿌리는 깊어 반드시 번성하리라/ 공은 이러한 내림에서 태어나 백사람 중에서 뛰어났네. 선현의 전통을 이었고 오직 그 조상을 본받았네/ 구름처럼 모여든 과거장에서 한 번 떨쳐 하늘에 떠올라 나라의 그릇이 되어 오로지 군직에 전념하였네/ 형벌을 다룰 때는 엄격하게 하였고 은혜는 멀리까지 미쳐 친밀함을 더하였네/ 간사한 무리들 설 땅이 없어지고 칭송의 노래는 사방에 넘쳐흘렀네/ 용연암 위에 정자가 있어 호연히 돌아왔으나 멀지 않아 다시 불려 올라갔네/ 사헌부의 높은 벼슬이 주어지고 머나먼 의주 땅은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네/ 시정을 함에 있어 지방 교육을 우선함으로써 근방의 풍속이 크게 바뀌었네/ 호조에서 부세를 관장하였고 중국 수도에 사신으로 행차하였네/ 공과 같은 웅재는 실로 감사의 지위에 마땅한데 소인배에게 잘못하여 황해도 감영을 사양하였지만 여러 차례 수령을 거친 다음 옛집으로 물러났네/ 지위는 덕망에 미치지 못하였고 명성은 매우 높았지만 자기의 앞길은 순탄치 못하였네/ 그러나 뒤끝이 훌륭했으니 누가 공을 불행하였다 하리오/ 임란의 흉봉을 벼락 치듯 때려 부수니 아드님의 그 공훈 세상에 혁혁하네/ 나라의 은총 무덤 속까지 미쳤으니 그 영광 어디에 비기리오. 신당의 언덕에 낙동강이 곁에 있다네/ 8척의 높은 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하네. 내 이 명을 새기노니 천추만대에 길이 빛나리라.[(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贈禮曹判書郭公神道碑銘 幷序)

惟郭氏世爲聞家。顯於麗氏。入國朝有諱瓊。官至知永州事。二世而至益山郡守諱安邦。以淸白著。積慶啓祉。克昌以大。於公爲高祖。有子曰諱承華。成均進士。孫曰諱瑋。爲禮安縣監。是生諱之藩。成均館司成。贈承政院左承旨。娶同知許磷女。生三子。公其仲也。公諱越。字時靜。生六歲。先見背。鞠於外家。幼時重遲。稍長嗜學。工制科業。中丙午司馬。以嘉靖丙辰登別試文科。調承文院正字。庚申丁內憂。甲子出補大同察訪。丙寅陞榮川郡守。居四年棄官歸。累遷爲大丘府使。尙州,星州牧使。皆不赴。徵拜司憲府持平。轉掌令。改司諫院司諫。甲戌擢授義州牧使。進通政大夫。丁丑除戶曹參議。戊寅以冬至使朝京。己卯還。拜黃海道觀察使。辭不赴。辛巳拜濟州牧使。大臣以公老。濟且絶海白上。改靑松府使。乙酉爲南原府使。未幾罷。粤明年以疾卒于玄風率禮村之私第。實萬曆十四年丙戌八月六日也。享年六十九。葬于仇知山神堂里先人之墓次。公之爲大同察訪。尹元衡以肺腑。挾上寵張甚。人視如虺蜮。有蒼頭着道袍躡履陞階。公怒杖之。聞者以爲快。爲榮川郡守也。御下以嚴。亦不喜爲苛急。其於單赤。尤能曲體其隱。國法特遣御史。發州縣文書。得不法。狀罪或至死。謂之虎行。公方坐堂聽事。尹御史根壽猝入。公不爲動。尹公服其器度。亟稱之曰。吾以暗行。閱州縣多矣。未見處事從容若是人者。時逋租不能入者歲萬石。民益困。公焚其卷。充之以耗穀。吏民無不叫抃鼓舞。及其去也。遮公不得則立石以見思。在言地。岳岳自持。論劾無所避。以此名益重。初義州僻遠。民不識敎化。公爲設敎禁。尤致意學校。民爲立興學碑。其在南原。方伯巡到府。以嬖妓自隨。公怒曰是簡我也。老夫雖廢退。方伯雖尊。獨奈何挾娼過吾府。不爲之設妓食。方伯嗛之。竟中公以殿罷歸。公杰巍負氣。體貌魁碩且頎。目光爛爛。人自嚴畏。長於治劇。剖決若流。臨事磊落。不守常轍。律身又極峻潔。歷郡邑二十年。田宅無所增。不爲子孫後日毫髮計。故入朝無疑行。處鄕無議言。公所爲文。汪洋雄健。無世俗氣。貢擧十二。居魁者八。膾炙一時。善射又其天性。公退輒布帿爭鵠。發無不中。朝廷以公爲文武才。國有緩急。可屬大事。後公之子再祐起閭巷。擊倭立大功於壬辰癸巳間。名顯華夷。人以爲有父風。以再祐貴贈公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世子左賓客。公再娶。元配晉州姜氏。贈牧使應斗之女。次配金海許氏。參奉瓊之女。後公十二年卒。其葬用古禮。以元配姜氏夫人祔。而葬許氏夫人於墓左。有七男女。長曰再禧次曰再祿次曰再祐。卽忘憂堂也。女適許彥深。姜氏出也。次曰再祉次曰再祺。女適成天祚。許氏出也。再禧娶固城崔氏。有一子曰源。孼出也。再祿娶咸安趙氏。有三子。曰澧曰滃曰昌後。再祐娶尙州金氏。南冥先生外孫女也。有二子。曰瀅曰活。再祉娶昌寧成氏。有一女。再祺娶靈山辛氏。有二子。曰瀏生員曰瀜著作。丁卯文科。公內外孫爲曾玄者幾二百人。公之子再祺。一日請銘於世濂曰。事固不可知。先大夫棄不肖輩今四十九年矣。以先大夫之爲名臣。有子若忘憂堂。其葬也尙不得文若銘貞諸石。則以愼之故。然遲之四十九年而幸得遇使君使。君能有意乎。則先大夫死且不朽矣。世濂故重公父子津津乎其口。於是請也敢辭。銘曰。

惟郭之先。世種厥德。源大不竭。根深必殖。公生有自。百夫之特。紹濟前武。伊祖惟則。裒然大庭。一奮天翼。蔚爲國器。才專郡職。愓悍以刑。恩遐若昵。姦欺自失。謳謠四溢。龍淵之上。實惟我室。浩然歸來。曾不終日。旣皁其囊。霜臺峻秩。邈彼龍灣。地接華貊。政先庠序。遐風丕革。掌賦地曹。朝元帝陌。若公雄才。實宜閫節。不悅於佞。還辭海臬。累割牛刀。縣車舊蓽。位不稱德。名昇已屈。克相後人。孰謂公絀。霆擊兇鋒。令子之揭。寵及玄壤。榮莫與埒。神堂之岡。洛水在側。八尺穹碑。行者所式。我勒斯銘。光於千億。]"

[의의와 평가]

곽월 신도비는 묘소와 함께 곽월의 생애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며, 이와 함께 조선 후기 신도비의 형식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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