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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654
한자 坪村里 遺蹟
영어공식명칭 The Ancient Site at Pyeongchon-ri, Dals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 262
시대 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창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8년 2월 27일~2008년 10월 27일 - 평촌리 유적 경상북도 문화재 연구원이 발굴 조사 실시
현 소재지 평촌리 유적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 262
출토 유물 소장처 경상북도 문화재 연구원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2길 38[원제리 297-1]
성격 유적
면적 7,225㎡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에 있던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의 유적.

[위치 및 현황]

평촌리 유적(坪村里遺蹟)은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 들말 마을과 장승밖 마을 사이에 있는 달성 2차 지방 산업 단지 지원 도로 하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구지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일대는 낙동강 지류인 차천 유역의 충적지로 1980년대 초반 대대적인 경지 정리를 거쳐 현재는 대부분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유적의 평면 형태는 도로 개설 구간의 진행 방향인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며 면적은 4,528㎡이다. 유적의 북쪽 500m 지점에는 차천이 위치하며, 동쪽 경계는 국도 5호선, 서쪽 경계는 평촌리 고인돌 떼 Ⅱ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경작지, 남쪽 경계는 경작지, 북쪽 경계는 들말 마을의 진입로와 접해 있다. 조사 전 평촌리 유적은 농로와 도로 개설을 위한 교각 및 농수로 설치로 원지형이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고, 특히 훼손된 교란구 단면에서 돌널무덤 3기와 우물 1기가 노출된 상태였다. 발굴 조사 후 청동기 시대 3호·17호·20호 돌널무덤은 달성군 구지면 응암리 달성 청어람 2차 아파트 동쪽에 있는 육교 남쪽의 도로변에 이전 복원되었으며, 표지석과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2007년 11월 달성 2차 지방 산업 단지 지원 도로 건설 부지 내 평촌 교차로 부근의 교각 및 배수로 공사 중 청동기 시대의 돌널무덤 4기 등의 매장 문화재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발견된 문화재 확인 지점에 대한 공사 중지 요청과 함께 현장 보존 대책 수립을 통보하였다. 아울러 문화재 보호법령이 정한 절차에 따라 긴급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유적 확인 시 처리 방안에 대해 달성군 및 문화재청과 협의할 것을 통보하였다. 이에 대구광역시 종합 건설 본부는 2008년 1월 2일에 경상북도 문화재 연구원에 발굴 조사를 의뢰하였다. 그해 1월 19일에 동일 건설 부지 내 예현리 유적(禮峴里遺蹟)의 지도 위원회 결과 달성리 구지면 평촌리 구역은 기존 예현리 유적 발굴 조사에서 연장 발굴로 전환하되 확인된 유구 주변 지역까지 확대하여 유구의 성격 및 수량과 분포를 확인할 것이 제시되었다. 발굴 조사는 같은 해 2월 27일부터 10월 27일까지 실시되었으며,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 2기·돌널무덤 28기·독널 무덤 3기·상석 2기·수혈 유구 14기·집석 유구 1기, 초기 철기 시대~삼국 시대의 집자리 6기·수혈 유구 24기·수혈 유구 떼 1기·주혈군 3기, 삼국 시대의 집자리 1기·수혈 유구 17기·수혈 유구 떼 2기·주혈군 1기,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집자리 1기·수혈 유구 2기·우물 1기, 시대 미상의 수혈 유구 6기·주혈군 2기 등 총 116기가 확인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구는 Ⅰ구역과 Ⅱ구역 중앙에서 유구 성격별로 밀집 분포한다. 집자리 2기는 Ⅱ구역 중앙에서 서쪽으로 3m 간격을 두고 인접해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세]방형이며, 장축은 남북 방향과 동서 방향이다. 규모는 길이 1,480㎝, 너비 340~482㎝이다. 내부 시설로는 화덕 자리[노지], 벽구, 내부 수혈, 주혈 등이 있다. 돌널무덤 28기는 Ⅰ구역 중앙에서 동서 방향으로 열을 지어 밀집 분포하고 있으며, 대체로 차천 방향을 따라 5~7m 간격을 두고 4열로 진행하며 일부 돌널무덤은 산발적으로 분포한다. 4열 중 2열이 다른 열과 비교해 돌널의 규모와 출토 유물에서 우위를 보여 중심군으로 추정된다. 열 내에서는 1기 혹은 2~3기가 소군집을 이루어 3m 내외의 간격을 두고 분포하는데, 이 간격은 묘역 범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소군집을 이루는 돌널무덤은 서로 접해 있거나 1m 이내의 간격을 두고 동일한 장축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어 친족 관계를 가진 가족묘적 성격이 짙은 것으로 추정된다. 장축 방향은 하천 및 돌널무덤 떼의 분포 방향과 나란한 동서 방향이 20기, 남북 방향이 8기이다. 축조는 기반층에 장방형 묘광을 굴착하고 판석이나 냇돌을 이용해 평면 형태 'ㅍ', 'Ⅱ', 'ㅁ' 자형 등으로 석관을 축조한 후 묘광과 석관 사이는 흙이나 냇돌로 보강하였다. 시신 안치와 유물 부장 후 판석 수매의 뚜껑돌을 1~2겹 덮고 흙을 채워 넣거나, 냇돌을 적석하여 상석이나 외부로부터 돌널을 보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에는 대부분 점판암재 판석을 깔았으며, 18호만 목판을 깐 것으로 추정된다.

돌널무덤은 벽 축조 방식과 재료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점판암재 판석을 세운 상형, 판석을 세우고 냇돌을 평적한 혼축형, 판석만으로 평적하거나 냇돌만으로 평적한 석축형이다. 세 유형 중 석축형이 가장 견고하고 규모도 크며, 장축 방향도 전체 돌널무덤 떼 배치 방향과 나란하다. 아울러 대부분 유물을 부장하고 있어 세 유형 중 가장 신분적 우위를 가졌던 피장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인골은 18기가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머리 방향은 강 상류인 동향과 강을 바라보는 북향이 주를 이룬다. 장축이 동서 방향인 돌널무덤은 동향, 남북 방향인 돌널무덤은 북향을 주로 하며 남향도 확인된다. 시신 안치 방법은 무릎을 바로 편 신전장과 팔굽 및 무릎 관절을 굽힌 굴장이 확인된다. 인골[흔] 분석 결과 10구가 남녀 판별이 가능하였는데, 모두 남성으로 판별되었다.

유물은 매장 주체부[부장용]에서 돌칼·돌화살촉·옥이, 벽석과 보강토 사이[의례용]에서 돌칼과 돌도끼가 출토되었다. 돌널무덤은 일반적으로 청동기 시대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평촌리 유적의 돌널무덤 18호·25호는 초기 철기 시대~원삼국 시대, 즉 점토 띠 토기 단계에 속하는 수혈 유구 6호·24호와 중복 조성되어 있어 후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점토 띠 토기 문화가 유입된 이후에도 돌널무덤을 조성하던 집단이 기존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무덤을 지속적으로 조성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독널 무덤은 설치 방식에 따라 묘광을 수직으로 파서 독널을 수직으로 묻는 직치, 비스듬하게 묻는 사치, 수평으로 묻는 횡치로 나눌 수 있다. 평촌리 유적의 독널 무덤 3기는 석개 직치, 석개 사치, 횡치 독널 무덤으로 모두 단옹식이며, 돌널무덤 떼에서 6~8m 간격을 두고 분포한다. 독널로 사용된 토기는 구순각목문 토기와 야요이계 호형 토기, 파수부 발형 토기가 사용되었다.

집자리와 수혈 유구에서 출토된 토기는 대부분 편들로 기형을 복원하기 어렵다. 다만 집자리 1호에서 이중구연단사선문 토기편이 출토되어 집자리 조성 시기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돌널무덤에 부장된 토기는 없으며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단도 간 토기편, 뚜껑돌 상부 적석에서 삼각형 점토 띠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집자리에서 출토된 석기는 돌화살촉편, 이단 병식 돌칼 병부편, 돌칼, 합인 돌도끼[석부] 등으로 편평형의 돌화살촉과 중앙이 좁고 긴 형태인 돌칼 병부편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 전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돌널무덤에서는 돌칼과 돌화살촉이 세트로 출토되었다. 돌칼은 유경식 돌칼 1점, 일단 병식 돌칼 6점, [유절식]이단 병식 돌칼 1점 등 8점이 출토되었다. 돌화살촉은 능형의 세장유경식 돌화살촉이 주를 이루며, 유엽형 돌화살촉[16호]도 포함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는 세장방형의 평면 형태와 이단 병식 돌칼, 편평형 돌화살촉편 등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며, 무덤은 늦은 시기의 특성을 보이는 지하 심광의 돌널무덤과 송국리 문화의 확산과 관련 있는 독널 무덤이 확인된 점, 의기화된 돌칼과 세장한 돌화살촉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식이나 출토 유물에서 시기 차가 크지 않고, 18호와 25호의 축조 시기가 점토 띠 토기 문화가 유입된 이후인 기원전 2세기 대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있어 후기 후반이 중심 연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철기 시대~원삼국 시대의 집자리 6기는 Ⅱ구역 남쪽에 1.5~2m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분포한다. 평면 형태는 타원형과 원형이며, 규모는 장경 300~480㎝, 단경 306~450㎝이다. 내부 시설로는 주혈, 무시설 화덕 자리, 터널식 노시설이 있다. 초기 철기 시대~원삼국 시대의 유물은 거의 토기류로 점토 띠 토기, 두형 토기, 뚜껑, 파수부 항아리, 파수부 옹, 시루, 소형 토기, 가락바퀴, 화분형 토기, 타날문 토기, 주머니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이입품인 화분형 토기와 경질 소성의 타날문 토기 그리고 늑도 유적과 동일한 터널식 노시설 등은 점토 띠 토기 문화와 함께 남해안을 거쳐 낙동강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평촌리 유적은 남해안과 영남 내륙 지방을 연결하는 교역망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평촌리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후기의 돌널무덤은 당시의 묘제와 장법 등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기초 자료가 된다. 또한 초기 철기 시대부터 원삼국 시대까지의 유구는 당시 달성의 지역적 입지 성향 및 위치에 따른 지역 양상과 더불어 차천에서 낙동강으로 연결되는 수계상의 문화·문물 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주목할 자료로 판단된다. 더불어 주변의 고봉리 고인돌, 평촌리 고인돌 떼 Ⅰ·평촌리 고인돌 떼 Ⅱ·평촌리 고인돌 떼 Ⅲ과의 연계성 및 달성 지역의 선사와 고대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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