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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암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1496
한자 止巖集
이칭/별칭 『지암 선생 문집』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전적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보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848년연표보기 - 『지암집』 간행
소장처 연세 대학교 학술 정보원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신촌동 134]
성격 고도서|시문집
저자 도신수
권책 6권 2책
행자 10행 19자
규격 29.0㎝[세로]|19.4㎝[가로]
어미 상향 흑어미(上向黑魚尾)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용호 서원에 배향된 학자 도신수의 시문집.

[저자]

도신수(都愼修)[1598~1651]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학자로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도여유(都汝兪)이고, 어머니는 여흥 이씨로 증판결사 이우겸(李友謙)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7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성균관 학유(學諭)·학정(學正)·박사(博士) 등을 역임하고, 참예도 찰방(參禮道察訪)에 옮겼다가 임기가 만료되었다. 성균관 전적·형조 좌랑·공청도 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올려 왕으로부터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았다. 서사원(徐思遠)으로부터 역학(易學)을 배웠으며 성장하여서는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 수령으로 재임할 때 공무를 신속히 처리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달성의 용호 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지암집(止巖集)』은 정확한 간행 경위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에 의해 1848년에 간행되었다. 권두에 1784년(정조 8) 정범조(丁範祖)의 서문과 권말에 1838년(헌종 4) 이희발(李羲發)의 발문이 실려 있다. 『지암 선생 문집(止巖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목판본 6권 2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단변(四周單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상향 흑어미(上向黑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29.0㎝, 가로 19.4㎝이며, 반곽은 세로 20.6㎝, 가로 15.1㎝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19자이다. 연세 대학교 학술 정보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에 연보(年譜), 권2에 시(詩) 86수, 만(輓) 9수, 부(賦) 4편, 논(論) 1편, 책(策) 4편, 권3에 서(書) 6편, 서(序) 2편, 제문(祭文) 13편, 잠(箴) 5편, 명(銘) 1편, 가(歌) 3편, 묘명(墓銘) 4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4에 강학록(講學錄), 언행록(言行錄), 울산 향약 팔조(蔚山鄕約八條), 부록으로 묘지(墓誌),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용호 서원 상량문(龍湖書院上樑文)」, 「용호 서원 봉안문」, 「용호 서원 승호 고유문(龍湖書院陞號告由文)」, 「묘우 중수 환안문(廟宇重修還安文)」, 보유로 「제자암이공문(祭紫巖李公文)」, 권5에 부록으로 제문, 만사(輓詞), 권6에 부록으로 지구시축(知舊詩軸), 「관북 별장(關北別章)」, 「학성 별장(鶴城別章)」이 있다.

시 가운데 「제가지암(題可止巖)」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암중(巖中)에 은거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명승 고적을 찾아다니며 읊은 시와 송별시가 대부분이다. 형식으로는 칠언 율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도우이구산생공자(禱于尼丘山生孔子)」는 숙량흘(叔梁紇)이 이구에서 기도를 해서 공자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 하는 물음에 대답한 글이다. 이 글에서 성인의 탄생은 보통 사람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천지와 사시(四時)의 운행이 조화되어 만민을 낳고, 또 성인도 태어나는 것이지 범부(凡夫) 한 사람의 정성으로 성인이 날 수는 없는 것임을 논하였다. 「왕약왈어적운운(王若曰禦敵云云)」은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효종에게 국사를 논한 것을 예로 들면서 적을 방어하는 데 마땅한 대책이 시급함을 주장한 글이다.

권4에 수록된 강학록은 정구에게 강학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물어 기록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충(忠)·신(信)·예(禮)를 강조할 것, 『춘추(春秋)』의 뜻을 익힐 것, 일을 급히 이루려 하지 말 것, 극기(克己)의 도를 익힐 것 등 10여 가지가 문답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배움이 민풍(民風)과 세도(世道)에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권5에는 부제학 김응조(金應祖)를 비롯, 88명이 도신수에 대해 쓴 만사가 실려 있어 그의 행적과 교유 관계를 살필 수 있다. 행장은 이상정(李象靖), 묘갈명은 김응조가 찬하였다.

[의의와 평가]

울산의 향약은 인조조 울산 부사 도신수『지암집』 울산 향약 팔조가 현재까지 유일하다. 『지암집』의 연보조에 도신수가 부임한 이듬해[1644년]에 "어시장에서 받는 세(貰)를 혁파했다"고 했는데, 고을 곁 바닷가에서 어상(魚商)들이 세를 받아 극심한 민폐가 된 것이 오래여서 부임 초 임금에게 아뢰어 혁파했다고 부연했다. 그리고 곧이어 "8조를 설립해서 고을의 자제를 훈계했으니, 남전 향약을 모방하여 그 조항을 여기에 모았다"라고 했다. 이로 본다면 도신수가 향약을 설립한 것은 울산 어상들의 작폐가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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