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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A010301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마을
집필자 박경용

[정의]

권학 전통과 금계초등학교 유치 운동

[역사적으로 높은 교육열의 전통]

농촌에서 교육시설은 보통 인구가 밀집한 면 소재지 이상의 행정 중심지역에 들어선다. 하지만 다리목 마을의 대구 금계초등학교는 행정 중심지가 아닌 일반 자연 마을에 설립되었다. 이는 300호가 넘는 대촌(大村)이라는 점 외에도 200여 년 전부터 고을의 서당 교육이 이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온 역사적 전통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 마을 출신의 선비 야헌(野軒) 김성노(金成魯) 선생은 1812년(순조 13) 낙교재 서당을 세워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러한 권학(勸學)의 영향인지 다리목 마을 금계초등학교는 동민들의 노력으로 1962년 설립되어 54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처음에는 옥포 초등 학교 금계 분교로 출발하였지만, 1966년에는 마을 뒷산의 이름을 딴 ‘금계초등학교’ 교명으로 곧추설 수 있었다. 1968년 처음으로 100명을 배출한 이후 지금까지 49회에 걸쳐 총 2,44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교 유치를 둘러싼 소지역 갈등]

하지만 설립 당시에는 본리리, 간경리, 기세리 등 동부지구 주민들과 상당한 갈등도 있었다. 교항리 다리목 마을을 비롯한 법화리, 신당리 등 서부지구 학생들은 이전에는 상당히 먼 길을 걸어 면 소재지의 옥포 초등 학교를 다녔다. 이러한 애로를 덜고자 다리목 마을 사람들은 1960년대 초부터 분교 설치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교세(校勢)의 약화를 우려한 동부지역 주민들은 적극 반대하였다.

이로써 옥포면[현 옥포읍]은 행정 중심지로서 행정관서 실세들이 많은 동부지구와 농지 관련 단체의 실제들이 많은 서부지구로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다. 교육위원들도 동부와 서부지구 각 1명씩이었다. 이에 교육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소지역 간의 갈등이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이쪽에서는 학교를 하나 지어야 되겠다. 저쪽에서는 그렇게 되면 이 학교가 찌그러든다. 학교가 발전이 없다. 안 된다고 하지. 그런께 동부와 서부가 두 편으로 갈맀뿟다 말이라. 이래가지고 교육 문제로 인한 분란이 한참 동안 지속되었어요.”(김0린)

[1962년 개교를 위한 노력들]

다리목 마을 분교 설립 문제는 1962년 경상북도 교육 위원회에서 결론이 났다. 분교 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정부로부터의 예산 지원안도 가결되었다. 다리목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는 분교 설립 추진 위원회도 구성되었다. 하지만 행정관서 실제들이 많은 동부지구에서는 이의 저지를 위한 움직임도 적지 않았다.

당시 다리목 마을 동장 겸 분교 설립 추진 위원회 총무를 맡았던 김선린(87세)에 의하면, 동부지구에서는 행정력으로 동장 직까지 박탈하려 했다고 한다. 이른바 ‘동장 해임 파동’이다. 동부지구 출신의 면장은 추진 위원회 업무를 위해 군청이나 도청 등지로 다니느라 동장 회의에 수차례 불참한 이유를 들어 다리목 마을 동장을 해임시키려 했었다.

학교 설립 방침이 정해지자 인근의 법화리, 신당리를 비롯한 다리목 마을 사람들은 우선 3,000여 평에 달하는 학교 부지 학보를 위해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였다. 당시 관례로는 부지 대금 일부를 해당 지역에서 경상북도 교육 위원회에 납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금계초등학교가 다리목 마을 내에 설립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교사 신축 과정에서 자진해서 부역까지 했다.

[참고 문헌]

대구 금계초등학교(http://www.taegu-kg.es.kr)

[정보 제공자]

김0태(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야헌 처사 유적 보존회 전 회장)

김0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26 행정지명 현행화 옥포면에서 옥포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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