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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논공과 고령 성산면의 길목, 무계나루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B020101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씩실마을
집필자 송호상

[정의]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는 고대 이래로 낙동강을 이용하는 교통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낙동강 건너 고령과는 왕래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그러한 교통의 중심에 무계나루터가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달성과 고령을 이어주는 무계진〕

낙동강 변에 위치한 삼리 1리 씩실마을에서 강을 건너면 바로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다. 그 무계리에는 예로부터 나루터가 있어서 두 지역을 왕래하는 교통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무계 나루터가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은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부터이다.

조선 태종대 연해를 따라 조운을 하던 과정에서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낙동강 수로를 통해 상주의 낙동진까지 운반하여 한양으로 이송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상주의 낙동진에서 합천 초계의 사기소(沙器所) 사이에는 수참(水站, 조창)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계나루터였다.

〔조선후기 상업의 중심지〕

이러한 무계나루터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성주목의 동안진과 달성의 사문진과 더불어 중요한 나루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장시(場市)의 수가 증가하고, 장시간의 거래가 활발해 짐에 따라 나루터의 역할이 한층 부각되었다.

이러하 상행위 뿐 아니라 정부의 세곡 운반을 위한 조운의 중심지로서의 기능도 활발하게 수행하였다. 조운의 중심지로서 무계에도 무계창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인조대 이후 양산의 감동창, 사천의 장엄창 등에서 전세로 거둔 곡식을 무계창으로 운반하여 모은 다음 서울로 상납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이렇듯 무계리는 무계나루터와 무계창, 그리고 무계역이 위치할 정도로 낙동강 중류지역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였다. 규모로서는 상주 낙동진 다음으로 컸다고 한다. 낙동진이 조운을 담당하는 대가로 10결의 복호(復戶-호가 부과하는 요역을 감면)를 받았는데, 무계진은 근저 동안진과 함께 8결의 복호를 받았다고 한다.

무계창은 근처의 전세곡을 수납하기도 하였고, 무계진을 통해 소금과 생선, 그리고 농산물의 활발한 교역을 주도하였다. 이는 무계장을 형성시켰으며, 이러한 물자들을 매개로 강 건너 달성의 논공장과의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고 보여 진다.

〔임진왜란의 격전지, 무계진〕

또한 무계진은 임진왜란 당시 성주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발한 활동을 벌인 송암 김면이 왜적을 물리친 격전장이기도 하다. 당시 김면 의병진에는 육일헌 이홍량도 가담하였다고 한다. 무계리 마을 뒷산에는 무계리 산성(茂溪里 山城)의 흔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마을 뒷산에 산성을 쌓아 북쪽의 자연 절벽을 방어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토성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무계나루가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던 것이다.

〔철도와 교량, 도로에 밀려 역사속으로〕

무계진은 조선후기 이래로 화원의 사문진과 더불어 경상감영에서 관리를 직접 파견하여 관할할 정도로 낙동강 중류의 대표적인 나루였다. 일제 강점기까지 운영되었던 무계진은 1905년 경부선의 개통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그리고 달성군과 고령군을 연결하는 낙동강교(88올림픽고속도로), 고령교, 성산대교가 개통된 이후 무계나루터는 더 이상 운영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참고문헌

전덕재, 「조선시대 영남지역 포구와 나루의 변천-낙동강유역의 포구와 나루를 중심으로」,『島嶼文化』 28,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06.

「신 낙동강 시대 (31) 고령 무계마을,『매일신문』 2011년 2월 16일.

『디지털 고령문화대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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