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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모퉁이,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C010303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집필자 여수경

[정의]

대구시 모퉁이,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생활권은 대구시 행정구역은 경상북도 달성군]

1984년 동아일보에는 ‘행정구역 불편한 곳 많다’라는 제목으로 전국에 행정구역으로 인해 생활권이 바뀌어도 조정하지 않고 버스 갈아타고 군청과 도시로 출근하는 곳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첫 번째로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에 대한 이야기로 기사의 포문을 연다.

경북 달성군 가창면은 지리적으로 대구시의 한쪽 모퉁이에 위치, 대구시와 작은 내 하나를 두고 갈라져 있다. 이곳은 면소재지가 경계선에서 불과 500m, 대구 중심지까지는 8km 거리이며, 대구쪽 아닌 곳은 모두 높은 산으로 막혀 있어 대구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다. 이 때문에 이곳은 지난 57년 대구시로 편입됐으나 63년 6월 농촌지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달성군에 편입됐다. 그러나 이곳은 농촌이라기 보다 대구시민의 휴양지와 주거지 기능을 하고 있어 사실상 대구시의 일부나 마찬가지이다. 주민 2천5백 가구 중 비농가가 44%인 1천 62가구나 되며 농가의 40대 이하 청장년들도 대부분 대구 시내 직장에 다니고 있다. 총 면적 1만1천여ha 가운데 약 84%인 9천2백여ha가 임야로 높은 산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어 농하도 한계에 달했다.…중략…(동아일보, 1984년 10월 17일)

‘대구시의 모퉁이에 위치한’ 대목에서 가창면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대구시에 인접하지만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달성군으로 분류되고,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각종 규제에 의해 개발은 허가되지 않는 낙후된 지역이 가창군 내 정대리이다.

[마을 내 한 대의 전화기]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함께 오지 마을 정대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새마을운동 당시 농어촌 중 개발제한구역 주민들에 대한 우선권으로 다른 곳에 비하여 일찍 전기가 들어왔다. 전기는 들어왔지만 마을 주민들 모두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화는 정대1리 배정 삼거리에 위치한 주점에 비치되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전화도 없었어. 행정기관도 연결해가지고 행정기관도 저 아래가고. 사무실 고도 아무리 사람이 있어도 잘 못 들어가거든. 그래가지고 그 주점에 갔다 놓고 돌려가지고 인편으로 연락하고 어디 전화왔더라 하고(제0근)

당시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연결망은 우편이다. 하지만, 우편 또한 자주 왕래할 수 없는 지리적 한계로 인하여 일주일 또는 10일에 한번 한꺼번에 모아 배달되었다. 이외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또 다른 통로는 한번씩 마을을 찾는 징병 소집 담당관 또는 경찰관이다.

그때 면별로 우체국이 없었고 그 이후에 대구에 모아서 한꺼번에 가지고 오더라고. 우체부가 있었지만 우체국이 없었어. 징병 소집장은 담당관이 직접 가져다주고. 만약 안와서 안가게 되면 경찰이 잡아가고. (제갈익근, 1931년생)

[평지마에 들어 온 라디오]

동촌비행장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 온 평지마의 주민 제갈씨에게 우편과 징병 소집원을 통해 듣는 세상 이야기는 답답하기만 하였다. 시내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경험하였던 그는 늘 나라 안팎의 이야기들이 궁금하였다.

그렇지 새마을운동 한 76년 정도 되었지. 그 전에는 전부 호롱불 켰지. 라디오는 라지오 이야기하니까. 내 제대를 하고 나니까 그때 라지오가 라지오 그놈이 안되니까 밖에 소식을 못듣겠는기라. 그때 파동에 보면 앞에 아파트 들어선대 옛날 왜정때 능금밭이라. 그쪽 하천둑에 스포츠센터라고 그때 지었는거 알죠. 그때 처음 지을적에 내가 고 가니 일을 사흘 했는가 70년대 그렇지 사흘했지 싶다. 스포츠 센터 처음할 때 시작할 때 그래가지고 그거했는데 한 삼일 했는데 인자 그걸 가지고 라지오를 샀어. 라지오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내가 래디오를 사가지고 왔었어. 그때 모친이 살아계셨는데 모친이 그걸 듣고 그리 좋아할 수 없었어. 고기 오만 이야기를 다 하니 그리 좋아하셨어. 그래가지고 라디오를 샀었어.(제0근)

당시 정대리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했던 그는 대구 시내 건설현장에서 3일 동안 일을 한 뒤 받은 임금으로 라디오를 먼저 구입하였다. 그는 라디오를 가지고 돌아온 뒤 처음 목소리가 들렸을 때 어머니의 놀란 표정이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어머니의 즐거운 표정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당시 평지마에 유일했던 소식통 라디오는 인근 주민들까지 듣기 위해서 찾아왔고, 한동안 그의 집은 동네 사랑방과도 같았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행정구역 불편한 곳 많다’(1984년 10월 17일)
  • [정보 제공자]
  • 제0근(남, 1931년생,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평지마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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