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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초등학교의 설립과 폐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C020301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집필자 여수경

[정의]

정대초등학교의 설립과 폐교

[정대초등학교의 모태 정대사설강습소]

정대초등학교의 모태는 1940년대 여상지 선생이 세운 정대사설강습소이다. 당시 인근에서 유일했던 가창소학교는 정대리의 학생들이 통학하기에 먼 거리였다. 이에 지리적 한계로 인해 학교를 갈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하여 여상지 선생은 장학계를 모으고 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 결과 설립된 정대사설강습소는 1945년 4월 15일 용계초등학교 정대분교장으로 설립 인가를 받고 정식 학교로 개교하였다.

초가방이지. 방 하나에 빗장 치면 방 두 개되고, 열 살무나 아홉 살무나 한방에 다. 한반에 다 전부한테서 배웠지. 해방되가 미술광장 거기 초가집 지어가지고 우리는 9살 묵어 입학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선비가지고 1,2,3,4 이런 일본글 이런 것 배웠는데. 우리 아버지가 거(학교) 가거든 흑판에 이름을 써라 하거든 쓰고 주소 써라 카거든 써라 했는데. 아이고 가이께 일본 한자를 쓰고 쓰라카는데 나는 겁이 나가지고. 나는 기억이나 그거 나오면 자신이 있거든 그랬는데 아이고 일본 한자를 써 놓고 손들라 하거든. 못 쓰면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우리 백씨가 그 앞에 앉아 있는데 아이고 나는 이거 못쓴다 하거든 그게 생각이 난다.(이0분)

초가방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학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다. 정대사설강습소로 사용되던 초가집을 아래 방 하나로 구성된 학교는 학생이 많거나 또는 학년이 구분되면 빗장을 쳐서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 반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학생들은 일본어와 산수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초가방에서 정대초등학교의 모습을 갖춘 것은 마을 주민들의 노력에 따른 결과이다. 정대초등학교를 건립하는데 돌을 나르지 않았다는 마을 주민이 없을 정도로 학교를 건립하는데 있어 마을 주민들은 솔선수범해서 나섰다. 그렇게 하나씩 돌을 나르고 세운 결과 초가방에서 학교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정대초등학교의 개교와 폐교 과정]

1951년 용계초등학교 정대분교장은 정대국민학교로 승격하여 개교하였다. 이듬해 6년제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고, 이때 8명의 학생이 졸업하였다. 정대국민학교는 당시 정대리 주변 일대 용계국민학교까지 가기 어려웠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다니는 유일한 학교였다.

정대리 일대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졸업한 뒤 대구와 달성 등지의 중학교로 진학하였다고 전하며, 상호 선후배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학생 수가 많을 때는 300명이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이 일대 주변 학생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졸업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후 급격한 인구의 감소와 더 이상 외부인이 유입되지 않는 한계에 이르게 되자 학생수는 급감하게 되고 그 결과 개교 30년 1981년 다시 용계초등학교 분교장으로 흡수되게 된다. 이때는 학교의 건물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명칭만 용계초등학교 정대분교장이 되면서 3개 학급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1982년 정대초등학교으로 거행되는 마지막 제3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까지 졸업생 수는 494명이다. 이후 1994년 완전히 폐교되기 전까지 약 10여년 동안 학생들은 용계초등학교 정대분교에서 수업을 진행하게 되며, 이후 1994년 폐교와 함께 학생들은 통학버스를 이용하여 모두 용계초등학교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후 약 6년 동안 폐교로 방치되던 학교 건물은 2001년 대구미술광장으로 리모델링 되어 새롭게 개관되었다. 정대초등학교에 대한 흔적은 대구미술광장 입구에 세워진 교비를 통해서만 확인된다.

[참고문헌]
  • 대구용계초등학교 홈페이지
  • [정보제공자]
  • 이0분(여, 1933년,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평지마 거주)
  • 제0근(남, 1931년,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평지마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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