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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마 유일의 제갈 성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C030201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집필자 여수경

[정의]

평지마 유일의 제갈 성씨

[‘제갈’ 지금은 한 집 뿐이라]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정대1리 중 평지마는 제갈 성씨가 많이 거주했던 마을이다.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 평지마에는 2015년 현재 10가구 이상 거주했던 제갈 성씨는 모두 이주하고 80년 넘게 마을을 지키고 있는 제갈익근씨만이 유일하게 거주하고 있다.

본관은 남양입니다. 중국성. 많이 할 때는 한 11집 정도 되었는지 지금은 없어요. 한 채 분이라. 우리 큰집이 있었는데 저 밑에 김교수라는 사람이 사가지고 온 그 집이라.

8남매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대1리 대부분의 집들이 농지가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평지마에 거주했던 그의 집은 작지만 농지가 있어 그래도 주변에서 좀 산다는 집안이었다.

8남매 내 울로는 누님이 세분 계시고 내 밑으로 다섯치 나까지 여섯치. 우리도 어른때부터 농사가 좀 있었으니깨이. 여기서는 자랑이 아니라 요서는 그대로 산다고 했어요. 여기서는 시내로 시집 가는 것은 어려웠고, 저 재너머 우리 누님은 청도 재너머로 내 동생들은 딴데로 가고 그랬는데. 서로 연줄로 해가지고 그래 결혼했죠. 우리 그때 장가가고 시집가고 할 적에 선본다고 했지. 그 위에 사람들은 선보고 하는 것도 없었어요. 남자가 보러 갔지 여자가 보러 간 것은 없었고. 남자가 중간에 이야기하는 사람 안 있나. 와도 남녀간에 이야기하고 그런 것은 드물었고. 어른들이 주로

오지 마을 평지마에서 대구 시내로 시집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위로 세명의 누님들은 인근 청도 각북으로 밑에 동생들은 또 다른 곳으로 결혼해서 분가하였다.

[군 복무 사흘 휴가 기간 동안 올린 결혼식]

6·25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3년 공군으로 자원입대하였다. 1950년 군 지원을 위해 징병검사를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번번이 떨어졌다. 하지만, 계속되어 전해지는 소집장에 자원입대를 결정하였다.

그때 육군본부가 대구에 와 있었거든. 그때 내 나이가 조금 그래가지고 그 전에 징병검사를 몇 번 했어요. 한창 사변 날 때 징병검사를 했어요. 신체검사에 떨어진거라. 그런데 자꾸 소집장은 자꾸 오는기라. 자꾸 나이는 되지.

공군으로 자원입대한 그의 첫 군 복무지는 경상남도 사천시에 위치한 사천비행장이다. 그리고 약 3년 뒤 군 복무에 주어진 3일 간의 짧은 휴가 동안 아내 추경덕을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친 뒤 그는 다시 복귀하고, 결혼식을 올린 어린 부인은 남편이 없는 시댁에서 제대하는 1961년까지 약 6년 동안 혼자 생활하여야 했다.

안가고 안돼 빨갱이로 몰리기 때문에 안가고 안돼. 내가 53년에 군대가서 61년도에 제대를 했으니까. 내가 제대를 해서 보니까 집이 엉망이고 고통이 많았지. 결혼은 하고 사천에 있을 때는 정기 휴가 때는 한번씩 왔고.

군 복무 당시 2천원의 월급은 생활하기도 빠듯한 돈이었다. 군 복무 8년 뒤 월급은 약 4배 정도 올라 3만원이 되었다. 8년 동안의 긴 군 생활을 마친 뒤 그는 대구에 정착할 것도 고민했지만 장남인 그가 비웠던 빈자리가 컸던 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정대1리에서 생활은 2016년 현재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보제공자]

제갈익근(1931년, 남,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평지마 거주)

추경덕(1935년, 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평지마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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