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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C030302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집필자 여수경

[정의]

조길방 가옥의 사촌 조정래 가옥

[조길방 가옥의 쌍둥이 집]

이정남의 가옥은 문화재로 지정된 조길방 가옥의 맞은편에 위치한다. 한덤이의 입구에서 50° 이상의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고 왼쪽이 조길방 가옥 그리고 맞은편이 이정남 가옥이다. 조길방 가옥과 이정남 가옥은 외형의 차이가 있지만 자세히 보면 구조나 배치가 유사하여 쌍둥이 같다. 차이가 있다면, 조길방 가옥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과거의 모습을 원형 복원한 것이고, 이정남 가옥은 생활을 위한 수리 흔적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집이 한 150년 됐지 싶어예. 안에 다 뜯을 기라예. 올해는 다 뜯고 새로 지을기라예. 옛날에 불(을) 때. 큰방 때지, 작은방 때지, 사랑(방) 때지, 저 밑에 방 때지. 난 시집와가 밑에 방 저 살았거든. 난 그 자고. 우리 동서는 작은 방 자고. 사랑(방)은 아버님 주무시고. 큰 방은 어머님 주무시고. 그라이 우리는 잘 때가 없으가 저 자고.

1880년대에 지었다고 하는 가옥은 곳곳 세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정남 가옥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별채 그리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 등으로 구분된다. 완벽한 ‘ㅁ’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ㅁ’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처음 안채와 사랑채로 건립된 집은 식구들이 늘어나면서 별채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별채에는 그녀와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였다. 늘어나는 식구들만큼이나 집도 늘어나면서 그녀의 일도 함께 늘어났다. 겨울이 유난히 긴 산골 마을에서 방방 불을 지펴야 했고, 이 또한 그녀가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곡식 저장 창고와 디딜방아]

이정남 가옥의 입구에는 사랑채 뒤쪽으로 확장되어 위치하고 있는 우사와 디딜방아이다. 과거 2마리의 소가 있었다고 하는 외양관은 현재 일부 허물어져 있는 상태이며, 옆에는 최근까지 사용했던 디딜방아가 있다.

매냄이(바깥매남)카는데 물레방아가 있어가지고 그까지 또 소로 실고가고. 그래가이고 디딜방아 집에서도 찧어 먹기도 하고.

입구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한덤이에서 보기 힘든 넓은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마당을 중심으로 뒤쪽 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곳이 안채, 안채를 중심으로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식구들이 늘어나면서 새로 지은 집이다. 그리고 안채와 마주보고 창고 겸 곡식을 넣어 두는 곡식 저장 창고가 마주보고 있다. 안채는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지붕을 개량하고 앞쪽으로 알류미늄 샷시를 덧대 겨울 추위를 막고 있다. 이에 반해 사랑채와 부엌 그리고 옛날 곡식 창고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곡식 창고는 과거 산골 살림이지만 소 두 마리를 거느리며 비교적 농사를 지었던 흔적을 보여 주는 듯 선명하게 ‘七 ’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일곱칸을 채울 수 있을 정도의 곡식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곡식 창고 옆으로 4년 전 돌아가신 바깥어른이 마지막까지 부지런하게 사용했을 것 같은 각종 농기구들이 쌓여 있다.

[조길방 가옥의 사촌 조정래]

이정남의 택호는 산호댁이고, 남편은 조정래이다. 조길방 가옥의 주인과는 사촌지간이었다. 남편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집안 곳곳에는 2013년 먼저 간 남편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불때가 그렇잖아. 검댕이 올라와가지고. 솥이 거 있잖아예. 뒤에 합판쳐놔야 되지 안그러면 머 환하게. 우리 양반이 세상 비리기 전에 살았으예. 그런데 사람이 안 사니깐. 그래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정대초등학교 사친회 회장과 마을의 동장을 맡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남편은 마을의 일에는 앞장섰던 사람이다. 또한 마을에서 지내는 동제에는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우리 어르신 옛날부터 윽시 지극정성으로 드릿는데 지금은예 할 양반이 없으예. 없어가 아이고. 한 3년 여자들이 그래 조매큼 해가지고 요래 이고가이 합니다. 옛사흘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남자분들이 다 모이가지고 신을 내라예. 우리 양반은 숯(제당에 불을 밝혀 놓으면) 담배를 안 피워예. 이렛날 하면 언젭니까? 이레, 여드레, 아흐레, 초여흘,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나흘 나가거든. 그래도 담배 안 피웠으예. 윽시 정성을 지극하게 드렸으예. 찬물에 목욕하고. 그래 이 골짝에는 하마 깨끗해예.

남편이 정성을 다한 동제는 돌아가시는 그 해에도 그녀의 집에서 주관하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제일 제당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마지막으로 지내며 마지막까지 남편을 대신하여 동제에 대한 정성을 다하였다. 지금은 연로하여 주관할 수 없어 마을 주민 중 젊은 사람이 대신하여 지내고 있다.

[산골 마을 전화 받는 재미로 산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 칠남매를 낳아서 길렀다. 산골 살림에 어려웠지만 아이들의 공부를 시키는 것에 소홀하지는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제일 힘든 것은 진학에 따른 학교 통학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진학과 함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남겨 아이들만 대구로 나갔다.

전부 초등학교 졸업하고예 대구에 다 다들 먼 친척들 통해 가지예. 중학교 보내고 그라지예. 여 아들은 학교 가면 애먹어예. 내르막에 뛰가고, 올라가면 쉬가미 쉬가미 그래 오고. 여는 한참까지 동안 버스도 안 왔으예. 걸어댕기 대구까지. 그래 강산버스카면서 인제 저쪽 가창 가면 강산 있거든예. 그래가이 강산버스카면 우야다가 댕기고. 대구까지 걸어다니깐 참 멉디다. 대구 봉덕동까지 걸어야돼이.

7남매는 장성하여 대구와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제는 주말이면 부모님을 찾아온다. 관절이 아파 움직이기 힘든 그녀는 경사도가 심한 한덤이 길을 걷는 것이 힘들다.

길이 나 평지같으면 머 차 고거 사가이고 텔레비 보이 요래 졸졸 타고 가는거 있데. 여는 내리막에 몬 타잖아. 길만 평지 같으면 암만 그해도 사주지. 그렇지만은 그걸 몬하이. 논으로 몬가요. 맨날 혼자 이래 있어요.

그래도 마을을 떠날 마음은 없다. 사람도 집도 떠난 자리 이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한덤이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막내딸이 이전에는 평일마다 왔으예. 평일마다 오고 그랬는데 지도 아 있고 살림 살아야 되고 하이 그래 몬 오잖아. 그래가지고 전화는 맨날 해요. 낮에 바빠 몬하면 밤에도 하고. 하루에 둘 서이는 와예. 다리에(다른 사람이) 안그래도 그칸다. 아이고 우예 사는교? 그 산호띠기 우에 사는교? 마 전화 받는 재미로 산다.

‘산호댁이 우예 사는고’ 하며 한번씩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는 재미가 익숙하다. 60년을 억척같이 일하며 생활한 이곳이 지겨울 것도 같지만 그녀는 한덤이가 좋아서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정보제공자]

이정남(1932년, 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한더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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