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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정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511
한자 碑- 旌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집필자 정동락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위치한 비와 정려 현황.

[개설]

비(碑)는 사적(事績)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세워 놓는 것을 말한다. 재질에 따라 목비·석비·철비로 구분되며, 석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목비는 현존하는 것이 없고, 철비는 수량이 많지 않다. 비는 내용에 따라 탑비(塔碑)·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송덕비(頌德碑) 등으로 나뉘는데, 대개는 사건 당시 또는 그와 가까운 시기에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학·문자학·서예 등 여러 분야에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또 비의 구조와 양식 등은 미술사의 자료가 되고, 비에 새겨진 입비 연월일은 정확한 연대를 밝혀주므로 사료적 가치가 더욱 높다.

정려는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문과 정려를 세운 것은 신라 때부터이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가 세워졌다. 조선 시대의 왕들은 즉위하면 반드시 충신·효자·의부(義婦)·절부(節婦)에 대해 각 지방에서 보고를 하도록 하여 문려(門閭)를 세워 그 사람들을 정표하고 그 집의 요역을 면제하게 하였으며, 일부는 행적에 따라 상직(賞職) 또는 상물(賞物)을 주기도 하였다.

정표자들의 사례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화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정려·정문·복호(復戶)[조선 시대에 국가가 호에 부과하는 요역(徭役) 부담을 감면하거나 면제해 주던 제도] 등으로 포상함으로써 민심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수상을 목적으로 하는 자도 있어 정표자의 진위 문제가 자주 논의되기도 하였다.

[달성군의 주요 비 현황]

달성군의 주요 비는 크게 선정비, 송덕비, 묘비·신도비, 충효비, 불교비, 기타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선정비가 수량이 가장 많고, 송덕비가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건립 시기가 가장 앞서는 비는 1496년(연산군 2) 만들어진 이철견 묘비이다. 1945년 이전에 만들어진 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선정비(善政碑)

선정비는 수령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것으로, 간혹 지탄받는 탐관의 비까지 세워진 예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국법으로 금지한 적도 있었으나 개항기에는 수없이 많은 선정비가 세워졌다. 달성군에는 크게 현풍 현감과 대구 판관, 경상도 관찰사 등의 선정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1) 화원읍 설화리 비석군에는 순상국 홍공 훈 영세 불망비(巡相國洪公坃永世不忘碑)[1875년], 군수 김후 한정 애민 유애비(郡守金侯漢鼎愛民有愛碑)[1906년] 등이 있었으나 현재 행방불명이다. 성산리 유명악(兪命岳) 비석군에는 판관 유후 선정비(判官兪侯善政碑)[연도 미상], 판관 유후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命岳永世不忘碑)[1716년], 판관 유후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命岳永世不忘碑)[1714년], 판관 유후 휘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1767년], 판관 유후 휘 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1716년], 판관 유후 휘명악 영세 불망비(判官兪侯諱命岳永世不忘碑)[1716년], 판관 유후 선정비(判官兪侯善政碑)[1716년], 판관 유후 명악 애민 선정비(判官兪侯命岳愛民善政碑)[1715년]가 있다. 천내리 화원읍사무소 비석군에는 화원 면장 이정열 송덕비(花園面長李楨烈頌德碑), 판관 김후 휘 기현 청덕 선정비(判官金侯諱箕絢淸德善政碑)[1849년]가 있다.

2) 다사읍 매곡리 쌍호당 비로는 순찰사 이공 단석 자 유초 청백 선정 무휼 군민 불망비(巡察使李公端錫字有初淸白善政撫恤軍民不忘碑)[1859년], 순찰사 이 상국 휘 단석 청덕 선정 영세 불망비(巡察使李相國諱端錫淸德永世不忘碑)[1727년 개립(改立), 1830년 수립(修立)]이 있다. 매곡리 비석군에는 겸 순찰사 유 상국 휘 척기 유택 만민영…(兼巡察使兪相國諱拓基遺澤萬民永…)[1730년]이 있다. 박곡리에는 판관 이후 성열 영세 불망비(判官李侯聖烈永世不忘碑)[1888년]가 있다.

3) 가창면 대일리 가창 초등학교 비석군에는 순찰사 정 상국 휘 익하 영세 불망비(巡察使鄭相國諱益河永世不忘碑)[1753년], 관찰사 이 상국 휘 익보 영세 불망비(觀察使李相國諱益輔永世不忘碑)[1758년], 관찰사 윤 상국 휘 동도 영세 불망비(觀察使尹相國諱東度永世不忘碑)[1758년], 순찰사 민 상국 휘 백상 영세 불망비(巡察使閔相國諱百祥永世不忘碑)[1753년]가 있다.

4) 하빈면 감문리 달서 고등학교 비석군에는 겸 순찰사 황공 선 영세 불망비(兼巡察使黃公璿永世不忘碑)[1728년], 겸 순찰사 조 상국 영복 선정 영세 불망비(兼巡察使趙相國榮福善政永世不忘碑)[1727년], 판관 김후 병우 애민 선정비(判官金侯炳愚愛民善政碑)[1864년], 판관 송후 태진 영세 불망비(判官宋侯泰鎭永世不忘碑)[1869년]이 있다.

5) 현풍읍 상리에 김후 광태 기적비(金侯光泰記積碑)[1759년]가 있고, 성하리 비석군[총 40기 중 37기]이 있다.

6) 유가읍 금리에 행군수 윤후 휘 희순 애민 선정비(行郡守尹侯諱羲洵愛民善政碑)[1902년]가 있고, 상리에 유가 면장 노치원 용소 수보 기적비(瑜伽面長盧致源龍沼修洑紀蹟碑)[1934년?], 쌍계리에 순상국 김공 휘 명진 선정비(巡相國金公諱明鎭善政碑)[1890년]가 있다.

7) 구지면 응암리에 현감 정후 기태 애민 선정비(縣監鄭侯其泰愛民善政碑)[1874년]가 있다.

2. 송덕비(頌德碑)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워진 비로 지탄받는 인물의 비가 세워진 경우도 있었다.

1) 화원읍 성산리에 유학 서공 덕륭 유혜비(幼學徐公德隆留惠碑)[병인년], 천내리 화원읍사무소 비석군에 전 참봉 곽공 재헌 시혜 불망비(前參奉郭公在憲施惠不忘碑)[1916년?]가 있다.

2) 논공읍 금포리에 전 주사 논공 면장 정낙환 송덕비(前主事論工面長鄭洛煥頌德碑)[1930]가 있다.

3) 다사읍 매곡리 비석군에 향리 이재창 비(鄕吏李再昌碑)[신유년]와 과부 밀양 박성 불망비(寡婦密陽朴性不忘碑)[정유년]가 있다. 다사읍 이천리에는 학생 추공 상의 영세 불망비(學生秋公尙義永世不忘碑)[1839년]가 있다.

4) 가창면 용계리에 가선대부 정공 휘 은덕 유혜 불망비(嘉善大夫鄭公諱殷德遺惠不忘碑)[1879년], 정대리에 가선대부 장순억 송덕비(嘉善大夫張順億頌德碑)[1812년]가 있다.

5) 옥포읍 김흥리 비석군에 유학 박공 휘 정환 선덕 불망비(幼學朴公諱正煥善德不忘碑)[임자년], 성주 이공 교영 선덕 불망비(星州李公敎榮善德不忘碑)[신해년]. 김해 김공 휘 윤황 선덕 불망비(金海金公諱允璜善德不忘碑)[미상]가 있다.

6) 현풍읍 상리 비석군에 참서 곽공 성한 송덕비(參書郭公星翰頌德碑)[임술년], 곽공 종래 시혜 불망비(郭公鐘來施惠不忘碑)[임술년], 곽공 종래 시은 송덕비(郭公鐘來施恩頌德碑)[임신년]가 있다. 성하리 비석군 총 40기 중에는 유학 박도인 시혜 불망비(幼學朴道仁施惠不忘碑)[1913년], 참봉 서공 상민 송덕비(參奉徐公相敏頌德碑)[1854년]가 있다. 성하리에는 서공 철규 시혜비(徐公喆圭施惠碑)[1924년]가 있다.

7) 유가읍 한정리에 대구거 유학 이공 중래 시덕비(大邱居幼學李公重來施德碑)[1906년]가 있다.

3. 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

묘비·신도비는 사자(死者)의 이름·가계·행적 등을 돌에 새겨 묘역에 세운 것이다. 묘비와 신도비는 조선 시대 유학을 숭상하면서 입석이 조상에 대한 효의 한 표현으로 인식되어 크게 성행하였다. 신도비는 조선 시대에 2품 이상의 고관만 세울 수 있었으나, 때로는 공신·석유(碩儒)[큰 선비] 등의 신도비를 왕명으로 세우게 한 적도 있었다.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추적(秋適) 신도비[1864년]가 있다. 달성군 논공읍 남리에 이철견(李鐵堅) 묘비[1496년]가 있다.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에 의매 이랑지묘(義娣李娘之墓)[갑자년], 우록리에 증정헌대부 병조 판서 김해 김공 휘 충선지묘(贈正憲大夫兵曹判書金海金公諱忠善之墓)가 있다. 달성군 옥포읍 본리리에 통정대부 김공지묘(通政大夫金公之墓)[1677년], 가선대부 김공지묘(嘉善大夫金公之墓)[1677년], 강림리에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8호인 이철견(李鐵堅) 신도비[1497년]가 있다.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곽준(郭峻) 신도비[1634년, 1957년 중수], 곽재우(郭再祐) 신도비[1691년, 1957년 중수]가 있다.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곽재우(郭再祐) 묘비[1732년]와 곽월(郭越) 신도비[1635년]가, 도동리에 김굉필(金宏弼) 묘비[1640년], 김굉필(金宏弼) 신도비[1626년], 박성(朴惺) 묘비[1641년]가 있다.

4. 충효비(忠孝碑)

충효비는 국가의 교화 정책과 관련된 비로 전근대에 충과 효를 몸소 실천한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인물의 성격과 행적에 따라 순절비(殉節碑)·효자비(孝子碑)·정효비(旌孝碑)·열부비(烈婦碑)·정려비(旌閭碑)·정열비(貞烈碑) 등으로 나뉜다. 달성군 논공읍 금포리에 절부 유인 충주 석씨 비(節婦孺人忠州石氏碑)[1943년], 하리에 효자 윤공 재윤지비(孝子尹公載勳之碑)[1936년]가 있다.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에 효자 은진 송공지비(孝子恩津宋公之碑)[1914년]와 효부 유인 경주 김씨지비(孝婦儒人慶州金氏之碑)[1934년]가 있다.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순천 박씨 삼세 정충 기실비(順天朴氏三世旌忠記實碑)[1834년]가 있다.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에 열부 진양 강씨 실행비(烈婦晋陽姜氏實行碑)[1932년], 본리리에 효자 참봉 김공 형규지려(孝子參奉金公炯圭之閭)[1935년?]가 있다. 달성군 유가읍 본말리에 유인 고령 김씨 효행비(孺人高靈金氏孝行碑)[1925년]가 있다. 달성군 구지면 응암리에 효자 제갈남학지비(孝子諸葛南鶴之碑)[1938년]가 있다.

5. 불교비(佛敎碑)

달성군의 불교비는 사찰의 중수 관련 비나 승려의 탑비, 시주자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로 나뉜다.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남지장사 비석군에는 운계당 대선사 휘 축연 송덕비(雲溪堂大禪師諱竺演頌德碑)[1801년], 모계당 대선사 휘 취찰 송덕비(慕溪堂大禪師諱取札頌德碑)[1812년], 경운당 대선사 휘 미화 선덕비(景雲堂大禪師諱未化善德碑)[1801년]가 있다. 달성군 옥포읍 반송리 용연사 비석군에는 비슬산 용연사 중수비(琵瑟山龍淵寺重修碑)[1722년], 사바 교주 석가여래 부도비(娑婆敎主釋迦如來浮圖碑)[1676년], 석가여래 사리탑 중수비(釋迦如來舍利塔重修碑)[1934년], 동운 대사 비(東雲大師碑)[1644년], 송파 대사 비(松坡大師碑)[1676년]가 있다.

달성군 현풍읍 부리에 현풍 포교당 비[1673년]가 있다. 유가읍 양리유가사에 현감 조후 진태 몰세 불망비(縣監趙侯鎭泰沒世不忘碑)[1740년], 유가사 수도암에 낙암 대사(洛巖大師) 비[1752년]가 있다.

6. 기타비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에 전의 이씨 의관지장(全儀李氏衣冠之藏)[1774년]이 있다. 달성군 현풍읍 상리현풍 초등학교 안에 황국 신민 서사비[1940년]가 있고, 성하리에는 석빙고 건성비[1730년]와 수철원교(水鐵院橋) 비[1761년, 성하리 비석군 40기 중 1기]가 있다.

[달성군의 주요 정려 현황]

정려는 현재 3곳만 확인되고 있으며, 모두 정려각 안에 현판이 걸려 있다. 1945년 이전에 만들어진 정려를 살펴보면,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열부 학생 박지운 처 창녕 성씨지려(烈婦學生朴之運妻昌寧成氏之閭)[1794년], 현풍읍 지리에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9호인 현풍 곽씨 십이정려, 유가읍에 김처정·재령 이씨 정려, 효자 증 별검 청도 김공 휘 처정지려(孝子贈別檢淸道金公諱處精之閭)[1699년], 열부 청도 김공 휘 여탁지처 유인 재령 이씨지려(烈婦淸道金公汝鐸之妻孺人載寧李氏之閭)[1699년]가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2.03 내용 수정 [달성군의 주요 비 현황] 3. 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 신도비는 조선 시대에 3품 이상의 고관만 세울 수 있었으나, -> 신도비는 조선 시대에 2품 이상의 고관만 세울 수 있었으나,
2019.04.17 행정지명 현행화 옥포면 -> 옥포읍, 현풍면 -> 현풍읍, 유가면 -> 유가읍
이용자 의견
송** 3. 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

묘비·신도비는 사자(死者)의 이름·가계·행적 등을 돌에 새겨 묘역에 세운 것이다. 묘비와 신도비는 조선 시대 유학을 숭상하면서 입석이 조상에 대한 효의 한 표현으로 인식되어 크게 성행하였다. 신도비는 조선 시대에 3품 이상의 고관만 세울 수 있었으나
** 신도비는 조선시대에 2품 이상의 고관만 세울 수 있었으나
  • 답변
  • 디지털달성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인 결과 2품 이상만이 신도비를 세울 수 있다고 하여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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