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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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球 |
영어공식명칭 | Lee Gu |
이칭/별칭 | 대옥(大玉),은와(隱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대옥(大玉), 호는 은와(隱窩). 고조할아버지는 예산 현감을 지낸 이필(李佖)로 처음 하빈현[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거주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음사로 부장을 역임한 이경두(李慶斗)로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의하여 군공을 세웠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는 사마시에 합격한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으로 역시 임진왜란 당시 창의하여 공을 세워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군위 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후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수월당(水月堂) 이지영(李之英)으로 동생 이지화(李之華)와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하였으며, 사간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참봉 김치삼(金致三)의 딸 숙인(淑人)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다. 부인은 수운판관 허섬(許暹)의 딸 숙부인(淑夫人) 양천 허씨(陽川許氏)이다. 허섬은 양릉군 허적(許䙗)의 손자이다.
[활동 사항]
이구(李球)[1620~1684]는 하빈현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어 손처눌(孫處訥)의 문하생이 되었다. 1646년(인조 24)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53년(효종 4) 성균관 정자(成均館正字)를 거쳐 1656년(효종 7)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에 제수되었다. 이후 1658년(효종 9)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형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5월에 강원 도사에 제수되었지만 다음 달에 사직하였다. 이듬해인 1659년(효종 10) 7월 병조 좌랑으로 복직하였고 10월에는 해운 판관이 되었다. 1660년(현종 1) 병조 정랑, 이듬해인 1661년(현종 2) 형조 정랑을 거쳐 8월 순천 부사로 부임하였다.
1663년(현종 4) 순천 부사로 재직 시 간부(姦婦)의 살부 문제(殺夫問題)가 일어나 파직당하였다. 그 뒤 다시 등용되어 1666년(현종 7) 8월 태안 군수로 부임했으며, 1672년(현종 13) 양양 부사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져서 1673년(현종 14) 6월 양양 부사에서 파출되었다. 그 후 1674년(현종 15) 사도시 정(司導寺正)으로 복귀하였다. 1676년(숙종 2) 1월 성천 부사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우통례, 직강, 봉상시 부정, 군자감 정,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9월 길주 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윤휴(尹鑴)가 사사(賜死)되자 그 부당함을 말하고 글을 쓰는 등 등 호역(護逆)하였다는 이유로 6월 나포되어 국문을 당한 후 전라남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 1683년(숙종 9)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684년(숙종 10) 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4월 23일 정침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현승(李玄升), 이흥로(李興魯)가 편찬하고 1897년(고종 34) 간행한 전의 이씨(全義李氏) 가문 문인들의 문집인 『전성 세고(全城世稿)』에 시문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684년(숙종 10) 사간원 대사간으로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