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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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忠閣 |
영어공식명칭 | Samchunggak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74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박팽년·박순·박일산 3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조선 후기의 비각.
[개설]
삼충각(三忠閣)은 1755년(영조 31) 정려(旌閭)된 박팽년(朴彭年)과 1831년(순조 31)에 정려된 아들 박순(朴珣), 손자 박일산(朴一珊)의 3대에 걸친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1833년(순조 33) 경상도 관찰사 김양순[1832. 3~1833. 4]이 경상도 내 71주의 수령들에게서 비 세우는 비용을 돕도록 하였고, 후임 관찰사인 서희순[1833. 4~1834. 12]이 이 일에 힘써 1834년 박일산의 유허(遺墟)인 묘골에 비를 세우게 되었다.
[위치와 현황]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 아름 마을 초입에 있는 사육신 기념관 좌측 편에 삼충각이 위치한다. 삼충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사면에 홍살을 세워 내부의 비가 잘 보이도록 하였다. 비는 전면과 후면에 일부 훼손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하며, 비문도 육안으로 잘 판독된다. 비문은 후손인 홍문관 교리 박승현(朴升鉉)이 지었고, 글씨는 사헌부 장령 이동적(李東迪)이 썼다.
[형태]
비는 가로가 긴 장방형의 비좌 위에 규수형(圭首形)의 비신을 올렸다. 비신의 전면에는 ‘순천 박씨 삼세 정충 기실비(順天朴氏三世旌忠記實碑)’, 오른쪽 면에는 ‘숭정 기원 후 이백십이년 갑오 오월(崇禎紀元後二百十二年甲午五月)[1834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규모는 비좌 높이 37㎝, 길이 124.5㎝, 너비 80.7㎝이고, 비신 높이 146㎝, 너비 58㎝, 두께 27㎝이다. 재질은 오석(烏石)이다.
[금석문]
앞면에는 '순천 박씨 삼세 정충 기실비(順天朴氏三世旌忠記實碑)'라 적혀 있다.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써 있다.
“옛 일을 상고하면, 병자년에 단종께서 손위(遜位)하시매 우리 선조 충정공(忠正公)께서 항의하여 순절하시고 그 후 320년 을미년[1775년]에 영조께서 사손(嗣孫) 집에 ‘충신지려(忠臣之閭)’라고 정려하시었다. 다시 57년 후인 신묘년[1831년]에 우리 전하께서 종백(宗伯)[예조 판서]에게 하교하시어 선생의 아들 진사공(進士公)이 충정공을 따라 조용히 순절한 것과 진사공의 아들 사정공(寺正公)이 의젓하게 자수한 데 대해 아울러 정려를 명하시매 오두적각(烏頭赤脚)[정려각의 문미 위에 놓는 붉은 칠한 장식물]이 문미에 찬란하였다. 길가는 손님이 말에서 내려 탄식하기를 ‘이곳이 삼대 충신의 집이라’ 하였다.
삼년 후에 경상도 관찰사 김 공이 하빈(河濱)에 순행하여 육신사(六臣祠)를 참배하고 옛 자취를 추모하여 감개무량하여 감탄하기를 ‘여기가 평양씨(平陽氏)가 남은 고아를 보호하던 땅이라 삼세에 걸친 정려는 성조(聖朝)의 보기 드문 은전인데 어찌 실적을 기록한 비가 없어서 되겠느냐’고 하시고 이어서 일흔한 개 고을의 수령에게 통고하기를 ‘하빈에 비를 세우려 하니 비용을 돕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 해 여름에 김 공은 전임하고 서 공이 후임으로 오셔서 또한 이 일에 힘써서 노소 선비들에게 문의하고 각 읍에 통첩하여 많은 협조를 얻어 이듬해 모월 모일에 사정공(寺正公)의 유허에 비를 세우게 되니, 제공들이 나에게 편지하여 기사의 글을 부탁하게 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기를 ‘굽히면 반드시 펴게 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나 다만 때가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 조모 이씨께서 고독하고 씁씁함을 참고 배겨내서 유복 아기를 보호하여 길러내신 그 뜻이 말할 수 없이 슬프고 괴로움이 천고에 지사의 눈물을 자아낼 만한데 지금 병자년과의 거리가 삼백여 년 동안에 여러 임금님께서 충절을 포장함이 더할 수 없을 만큼 극진하여 이미 관작을 회복시키고 추증하였으며, 단묘(端廟)에 향사로 봉안하고 빛나는 정려가 주손의 집에 세워지게 되고 지금 장차 하빈 동리에 기실비를 세우게 되므로 우리 선조의 깊은 원한과 쌓인 울분이 오래갈수록 더욱 펴게 되니 참으로 천도가 오래간만에 바르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제가 후손의 한 사람으로 이곳에 이 비가 서게 됨을 다행으로 생각하여 감히 졸렬함을 무릅쓰고 지은 바이나 여기에 또 느낌이 없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집 문민공(文愍公)께서 다섯 아들 세 손자가 동시에 벼슬에 나아가실 때 충정공께서 말씀하시기를 ‘임금을 섬기는데 충성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라’ 하셨다. 우리 정조 대왕께서 사육신의 부친이나 아들 중에 특이한 절행이 있는 자는 영월의 단소에 배향하기를 허락한다는 빛나는 윤음(綸音)이 있는데도, 문민공에게는 정려의 은전이 미치지 못했으니 실로 이번 은전에서 빠진 바로서 후일을 기다리는 듯하니 누가 이 일을 조정에 청하겠는가? 이 비를 세우게 됨에는 두 분 관찰사의 힘이 지대했으니 김 공의 이름은 양순(陽淳)이신데 안동인이시며, 서 공의 이름은 희순(憙淳)이신데 달성인이시다. 이 비가 세워짐으로 장차 충의의 선비를 격려하여 길이 세상의 도리와 인심을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명(銘)하노니,
생각하옵건대, 충정공께서 인을 이루시고 의를 취하시어 해와 별처럼 빛나시고 우주를 진동시키셨다/ 삼세에 걸친 곧은 한마음 길이 인륜을 붙드시고 충성하는 마음으로 효도를 다함은 가정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네/ 빛나는 정려 이어받은 미덕을 우러러 보노라. 천도가 무심치 않아서 올바른 군자는 반드시 후사가 있는 법이므로 의롭게 고생하며 낙동강 가에 살아오니 실날같이 혈맥을 이으심은 천신이 보우하심이시다/ 하빈 옛 집에 사당과 유허가 있는데 중봉(重峯)께서 터를 닦아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글을 남겼네.
명장이 주둔한 곳 산돌아 쌓고 물 굽이쳐 흘러 집터 옮기지 않고 교목이 그대로 있어서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고 선비를 추모하여 의논하고 계획하여 삼세 정충비 세워서 드문 은전 크게 새겨 천백 세에 남기노라.[粤若稽丙子 莊廟之遜位也我先祖忠正先生抗節以殉後三百二十年乙未 英宗大王命旌嗣孫之閭曰忠臣/粤五十有七年辛卯我 殿下詢於宗伯以先生胤子進士公隨忠正從容取義曁進士公之胤寺正公毅然自首幷/賜棹楔之 恩烏頭赤脚煥瀾門楣過者下馬咨嗟曰是三世忠臣之門粤三年癸巳山南觀察使金公巡到河濱/祇謁六臣祠撫想往蹟徘徊感慨曰是平陽氏葆護遺孤之地也三世旌褒卽 聖祖曠世之典烏可無記實之碑乎/又遍告七十一邑之長曰將立河濱之碑盍濟其財是年夏金公遞而新按使徐公繼莅任又惓惓於斯詢及諸儒老少/齊聲文移屬邑遠近趨風將以翌年某月某日竪碑於寺正公遺址任事諸公以書屬記事之文於升鉉升鉉竊惟詘/神天之道也時有遲有速噫我李祖母零丁隱忍圖葆遺腹其志悲其事苦釀千古志士之淚而今距丙子三百年餘/列朝嘉尙褒忠獎節靡有不至旣復官而貤贈節惠矣壇壝祠廟而妥侑俎豆矣煌煌旌閣又立於冑孫之居今將樹穹碑於/河濱故里我先祖深寃積鬱愈久而愈伸信乎天道之久而定也升鉉忝居後孫之列竊幸是地之有是碑則不敢以陋拙辭而升/鉉於此又竊有所感者我家文愍公曁五子三孫同時幷命詔忠正公曰事君不忠非孝也肆惟我 正廟以六臣父若子中卓/爾之節許之華褒煒煌 命躋越中正壇而門閭之旌獨未洽於文愍誠爲未遑之典若有待於後日孰能以此請於 朝也今/玆三尺之碑實賴兩使之力金公名陽淳安東人徐公名喜淳達城人碑之立其將勸忠志之士而永樹風聲也銘曰/惟忠正公成仁取義昭揭日星震耀宇宙三世一心永扶人紀以忠爲孝庭訓所受烈烈綿竹瞻尙趾美天道不喪正學有後流/落孤若于洛之滸血胤一脉神護鬼葆挺身自首 特蒙恩宥家傳氣節生死一視 聖朝褒嘉表闕宅里星周單閼事若不/偶河濱舊居有祠有址重峰奠桂梧老留藻天將駐旌山回水繞井臼不移喬木猶在行路指點衿紳寓慕爰謀爰度 迺碑以樹顯刻 曠典垂示百禩]"
오른쪽 면에는 “후손 통훈대부 행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시강원 필선 문신 겸 선전관 승현이 짓고, 통훈대부 행사헌부 장령 이동적이 쓰다. 숭정 기원 후 이백십이년 갑오 오월 일[1834][後孫通訓大夫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侍講院弼善文臣兼宣傳官升鉉撰 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李東迪書 崇禎紀元後二百十二年甲午五月 日]"이라 적혀 있다.
[의의와 평가]
삼충각은 순천 박씨 삼세 정충 기실비의 비각으로 비문을 통해 사육신 박팽년과 아들, 손자의 충절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