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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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師哲 |
영어공식명칭 | Jung Sacheol |
이칭/별칭 | 계명(季明),임하(林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계명(季明), 호는 임하(林下). 증조할아버지는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봉된 동평군(東平君) 정종(鄭種)[1417∼1476]이다. 할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정예운(鄭禮耘)이고, 할머니는 사직(司直)을 지낸 이지맹(李之孟)의 딸 옹진 이씨(瓮津李氏)이다. 아버지는 정세검(鄭世儉)이며, 어머니는 진가모(陳嘉謨)의 딸 진산 진씨(珍山陳氏)이다. 부인은 참봉을 지낸 이호연(李浩然)의 딸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아들은 정광천(鄭光天)[1558~1594]이다. 형제로 정사안(鄭師顔), 정사증(鄭師曾), 정사민(鄭師閔) 세 명의 형이 있다.
[활동 사항]
정사철(鄭師哲)[1530~1593]은 1530년(중종 25) 경상도 대구도호부 하빈현 동곡리[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문장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재종형 정주(鄭輳)를 비롯하여 배신(裵紳)·곽월(郭越)·전경창(全慶昌)·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 등 지역의 여러 명사(名士)와 교유(交遊)하였으며, 이후 곽재겸(郭再謙)·손처눌(孫處訥)·서사원(徐思遠)·도원결(都元結)·윤인협(尹仁浹)·채몽연(蔡夢硯)·곽대덕(郭大德)·주신언(朱信言) 등이 정사철을 좇아 함께 지냈다. 또한 지역에 강학 장소를 지속적으로 마련하기도 했는데, 일찍이 1554년(명종 9) 성주목 팔거현(八莒縣) 사양(泗陽)[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에 서실(書室)을 지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연화동(煙花洞)[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임하 초당(林下草堂)을 지었다.
1570년(선조 3)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1571년 정구가 임하 초당을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였는데, 정사철의 아들 정광천이 정구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고을의 여러 인사와 향교에서 강학하였다. 1586년(선조 19) 낙동강 기슭 아금암(牙琴巖)에 초당을 지었는데, 이곳은 일찍이 정사철이 여러 명사와 교유하던 장소다. 1587년(선조 20)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에 선사 서사(仙査書社)[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소재]를 지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사철은 고을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경상 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소모관(召募官)에 임명하였으나 병으로 직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전란이 지속되자 정사철은 가족을 데리고 고령현과 거창현 등지로 피난을 갔으나 1593년(선조 26) 전염병에 걸려 피난지 거창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17세기 대구도호부 지역의 성리학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3권 1책의 『임하실기(林下實紀)』와 4권 1책의 문집인 『임하집(林下集)』이 전한다.
[묘소]
전란 중에 세상을 떠나 1593년 거창현 무등곡(無等谷)[현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 가장(假葬)하였다가 1596년(선조 29) 연화산(煙花山)[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선영(先塋) 아래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상훈과 추모]
1764년(영조 40) 고을 인사 주도로 정사철을 배향하는 사당을 연화산 아래에 건립하고 이름을 금암사(琴巖祀)라고 하였다. 1786년(정조10) 금암사가 금암 서원(琴巖書院)으로 승격되었다. 금암 서원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 때 훼철되었다가 지금은 금암 서당(琴巖書堂)으로 복원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