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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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孝術 |
영어공식명칭 | Choi Hyo Sul |
이칭/별칭 | 치선(穉善),지헌(止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치선(穉善), 호는 지헌(止軒). 할아버지는 동계(東溪) 최주진(崔周鎭)으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최식(崔湜)으로 갈천(葛川) 김희주(金熙周)와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과 함께 영하 삼걸(嶺下三傑)로 불렸다. 어머니는 입재 정정로의 딸 진주 정씨(晉州鄭氏)이다. 부인은 이동급(李東汲)의 딸 광주 이씨(廣州李氏)로, 둘 사이에 아들 최명덕(崔命德)과 최명우(崔命愚) 형제, 딸 세 명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효술(崔孝術)[1786~1870]은 1914년 달성군에 편입되었던 옻골 마을 출신이다. 평생을 경전과 성리서 연구에 정진하였으며,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 만든 부인동 향약을 봄과 가을 동민들을 모아 가르치고 지키도록 독려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이 된 후 수직으로 돈령부 도정에 제수되었다.
[학문과 저술]
어린 시절 재종 할아버지 최화진(崔華鎭)에게 가학으로 학문을 익힌 후, 1808년(순조 8) 상주의 우산 강소로 외할아버지인 정종로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1816년(순조 16) 『유사(遺事)』와 『잡기(雜記)』를 만들어 자성(自省)과 구익(求益)의 자료로 삼았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업에 정진하여 사서(四書)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서를 연구하고, 이황(李滉)과 이상정(李象靖)의 문집을 정독하여 성찰하기에 힘썼다. 1852년(철종 3) 『백불암집(百弗庵集)』을 교정하고, 1856년(철종 7) 향교에서 『심경』을 강론하고 『향교강록(鄕校講錄)』을 지었다. 1866년 이원조(李源祚)를 초청하여 동천사(東川社)에서 『대학(大學)』을 강하게 하고 『동천강록(東川講錄)』을 지었으며, 1867년(고종 4)에는 유호사(柳湖社)에서 『중용(中庸)』을 강하고 『사완강록(四完講錄)』을 지었다.
[묘소]
1870년(고종 7) 12월 사림이 달성군 광리[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에 장례를 치렀다가, 1877년(고종 14) 9월 19일 영천 모사방(毛沙坊) 남창(南昌) 뒤쪽 구룡산(九龍山) 기슭 병좌(丙坐)에 옮겨 장사 지냈다.
[상훈과 추모]
1830년(순조 30) 학행으로 관찰사가 별도로 천거하였다. 66세인 1851년(철종 2) 동래 부사 이휘녕(李彙寧)의 유일 천거(遺邊薦擧) 명단에 올랐으며, 1854년(철종 5) 암행어사 박규수(朴珪壽)가 포상하는 계를 올렸다. 1857년(철종 8) 암행어사 임응준(任應準)이 포상하는 계를 올렸으며, 1860년(철종 11) 장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1865년(고종 2) 1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5월 돈령부 도정과 부호군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