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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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時立 |
영어공식명칭 | Seo Sirip |
이칭/별칭 | 입지,전귀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대구 도호부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입지(立之), 호는 전귀당(全歸堂). 증조할아버지는 교관(校官)을 지낸 서우(徐遇), 할아버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서언겸(徐彦謙)이다.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서행원(徐行遠),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이다. 서시립의 부인은 민충보(閔忠輔)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와 호군(護軍) 김희신(金希信)의 딸 순천 김씨(順天金氏)이다.
[활동 사항]
서시립(徐時立)[1578~1665]은 1578년[선조 11] 대구 도호부 원북(院北)[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일본군이 대구 도호부로 접근해 오자, 일가족과 함께 팔공산(八公山) 삼성암(三省菴)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서시립은 산꼭대기를 오르내리며, 본가에 묻어 놓은 이삭을 파와 가족들의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1602년[선조 35] 큰 흉년이 들자 서시립은 동래부(東來府)까지 가서 쌀을 구하니, 동래 부사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인근 고을의 세미(稅米)를 바꾸어 주었다. 당시 정승이었던 이호민(李好閔)은 서시립의 효행에 감동하여 밀과(密果)와 어육(魚肉)을 내려 주었으며, ‘전귀(全歸)’ 두 자를 당호(堂號)로 삼게 하였다.
서시립은 서사원(徐思遠)과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서시립은 두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서사원이 강학하던 선사(仙槎)[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의 이천 정사(伊川精舍)와 정구가 강학하던 사수(泗水)[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를 수시로 왕복하였다. 나중에는 장현광(張顯光)을 좇아 함께 지냈다[종유(從遊)]. 학문을 배우는 동안에도 할머니와 부모, 그리고 중부(仲父)[둘째아버지]를 봉양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이호민은 서시립의 효행을 기리는 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1640년[인조 17] 조정에서 이경증(李景曾)이 “대구에 선비 서시립이란 사람이 있는데, 어린 아이들과 심부름하는 하인들도 ‘서효자(徐孝子)’라고 일컫습니다. 지극한 행실은 남보다 뛰어나나 몹시 빈궁합니다. 하루는 공림산(公林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다가 금을 얻으니, 마을 사람들은 효행이 신을 감동시킨 소치라고 하였습니다. 본 고을 수령이 진휼 감관(賑恤監官)으로 차임하자 한 번도 집에 가지 않고 마음을 다해 봉직하였다 합니다. 역시 초임의 낮은 관직으로 그의 효행을 표창할 만합니다."라며, 임금에게 서시립의 효행을 추천하였다. 이에 1641년 남별전(南別殿)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3권 2책의 문집 『전귀당집(全歸堂集)』이 전한다. 『전귀당집』에 수록된 「삼성록(三省錄)」은 임진왜란 때 팔공산 삼성암에서 겪은 피난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서시립의 효행을 살펴볼 수 있다.
[묘소]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의 선영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증직(贈職)되었다. 1692년[숙종 18] 서시립을 배향하는 백원 향현사(百源鄕賢祠)가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에 건립되었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 때 훼철되었다가, 이후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백원 서원(百源書院)으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