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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도동서원 통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1468
한자 1905年 道東 書院 通文
영어공식명칭 1905 year Dodongseowon Tongmun
이칭/별칭 통문,도동서원 통문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문서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도동리 35]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905년 5월 15일 - 1905년 도동서원 통문 작성
발급 시기/일시 1905년 5월 15일 - 1905년 도동서원 통문 발급
소장처 옥산 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옥산리 7]
발급처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도동리 35]지도보기
수급처 옥산 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옥산리 7]
성격 고문서
관련 인물 이언적|손중돈
용도 서간 통고
발급자 도동서원 회중
수급자 옥산 서원

[정의]

1905년 달성 도동서원에서 경주 옥산 서원으로 보낸 연락문.

[제작 발급 경위]

경주 양동 마을에서 발생한 손씨 가문과 이씨 가문 사이의 학문 연원 시비와 관련하여 경주 옥산 서원 측에서 사건의 전말과 손씨 측의 행위를 비난하는 통문을 도동서원에 보내오자 1905년 5월 15일 그에 대한 도동서원 측의 의견을 적어서 옥산 서원으로 보낸 것이다.

[형태]

낱장의 문서로서, 크기는 가로 34.1㎝ , 세로 58.0㎝이다.

[구성/내용]

도동서원에서는 손씨들의 근거는 자세하지 않으며 정조의 제문에서도 회재의 도학은 민락으로 직접 이어진다고 하였으며, 이황 역시 수수받은 바가 없다고 하였으니, 후학된 자는 각별히 정성껏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이상정(李象靖)이 동강 서원의 상량문을 지었을 때도 이러한 뜻을 새겨 놓았고 그 원문은 이미 대들보에 넣었으며 실기를 간행하면서도 넣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60년 전의 분쟁이 끝난 것은 사문의 행운임이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손씨들이 『경절공 실기(京節公實紀)』를 중간하면서 이미 새겨 놓은 상량문을 고치고, 의심스러움이 있는 장문을 보완하고, 도학의 계통과 관련한 서문을 증보하여 간행하면서 문자로서 현란하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위박이 천하의 시선을 막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이 한 가족과 마찬가지인 손씨, 이씨들에 대하여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 사이를 멋대로 재단할 수 없으나 이는 의리와 관련된 것이므로 한 목소리로 손씨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경계토록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은 옥산 서원의 뜻을 따라 도통이 바르게 서길 바란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영남 지역의 향전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학문적 연원 문제로 야기된 것이었다. 안동의 ‘병호 시비(屛虎是非)’, 성주의 ‘한려 시비(寒旅是非)’, 경주의 ‘손이 시비(孫李是非)’가 대표적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문중 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 지역의 문중들에게까지 확대됨으로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자료는 이씨 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도동서원의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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