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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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纖維會社爭議 |
영어음역 | Wolseongseomnyuhoesa Nodongjaengui |
영어의미역 | Wolseongseomnyuhoesa Labor Difficulti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창환 |
[정의]
1970년대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있었던 월성섬유회사에서 일어난 노동 운동.
[역사적 배경]
1970~1971년 월성섬유회사 노조에 영향을 미친 유사한 노동 쟁의가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1970년 2월 한국화이자에서 임금 인상 및 노동 조건 개선 요구 투쟁이 일어났으며, 1970년 7월에는 대한조선공사에서 임금 인상 요구 투쟁이 일어났다. 1970년 11월 전태일 분신 이후 14일 만에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1971년 2월에 아이맥전자에서 임금 인상 및 노동 조건 개선 요구 투쟁을 펼쳤다. 1971년 4월에 주한 미국 대사관 경비들이 임금 인상 및 노동 조건 개선 요구 투쟁을 벌였으며 1971년 9월 15일에는 한진 파월 노동자들이 KAL 빌딩을 방화하며 격렬히 투쟁하였다.
[발단]
월성섬유회사 종업원 208명이 1970년 12월 23일 전국섬유노조 서울의류지부 월성섬유분회를 결성하자 회사 측은 1970년 12월 25일부터 1971년 1월 12일까지 휴업을 하는 등 노조를 깨기 위해 방해하였다. 그러자 노조 측은 1971년 3월 22일 단체 교섭과 단체 협약 체결, 퇴직자에 대한 퇴직금 지불, 1970년대 말부터 1971년 초의 휴업에 대한 휴업 수당 지불을 요구하면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노동 쟁의를 제기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월성섬유회사 쟁의에 대해 3월 25일 서울시지방노동위원회가 적법 판정을 내리자 회사 측은 3월 30일 요구 조건을 전면 수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이를 어기고 4월 19일 서울시지방노동위원회에 근로기준법 제27조 제2항에 의한 ‘해고의 예고 예외 신청’을 내어 조합원인 공원 2명을 해고시키겠다고 하여 승인을 얻어냈다.
[경과]
1971년 6월 3일 조합원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농성에 들어갔으며, 회사 측은 이를 이유로 6월 5일 조합원 22명을 집단 해고시키고, 다음날인 6월 6일에 직장을 폐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종업원 50여 명이 6월 8일 직장 폐쇄 철회와 노동조합 활동보장, 단체 협약의 이행 등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고 농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과]
극한 상황이 빚어지자 회사 측과 종업원들은 우선 공장의 정상 가동을 위한 대화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현재 폐쇄 중에 있는 공장을 1971년 8월 초[8월 10일 이내]에 정상 가동함과 동시에 현재의 종업원들을 우선적으로 취업시키고, 1971년 5월분 임금은 1971년 7월 15일까지 완전 지급하되 임금의 30%를 6월 26일까지 지급하며 귀향 여비조로 1인당 1,000원씩을 동시에 지급한다.
[의의와 평가]
합의 내용은 조합원들이 원래 노사 분규의 쟁점이었던 노조 결성 및 단체 협약의 문제는 뒷전으로 미루고 정상 가동 시 현재의 종업원들을 우선적으로 취업시킨다는 약속만을 믿고 채불 임금을 받는 데 급급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월성섬유 노조가 직장 폐쇄라는 기업 측의 특단의 조치 앞에 완전히 무력해졌음을 보여주는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