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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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邦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덕원 |
출생 시기/일시 | 1606년 - 구방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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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89년 - 구방준 사망 |
출생지 | 구방준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
거주|이주지 | 구방준 이주지 - 경기도 포천시 |
거주|이주지 | 구방준 이주지 - 강원도 통천군 |
묘소|단소 | 구방준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 고마동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능성(稜城)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능성(稜城). 자는 석보(碩輔), 호는 도해정(蹈海亭). 아버지는 구암(具庵)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형은 구오준(具辵+手俊), 이복형은 구수준(具秀俊)이다.
[활동 사항]
구방준(具邦俊)[1606~1689]은 5세 때인 1610년(광해군 2) 어머니를 여의었고, 12세 때인 1617년(광해군 9) 충의위(忠義尉)였던 아버지 구암이 이이첨(李爾瞻)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고도(孤島)로 유배되었다가 1622년(광해군 14) 5월에 적소(謫所)에서 죽는 등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형인 구수준(具秀俊), 구오준(具辵+手俊)과 함께 학문에 힘쓰며 가업에 종사하였다.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일찍이 세상을 떠난 부모를 생각하면서 특히 어머니를 꿈에서라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기원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팔십 평생을 소복(素服)만 입었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개천 군수였던 종형제 구현준(具賢俊)이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김화(金化)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구방준은 형제들과 함께 구현준의 장례를 치른 후 온 가족을 데리고 강원도 통천으로 피난하였다. 이후 이곳에 정착한 구방준과 형제들은 도해정(蹈海亭)이란 정자를 세우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 내며 한미한 시골 사람들도 유교 경전을 읽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구방준과 형제들은 서로 우애가 지극했는데, 특히 구방준은 형들을 부모와 같이 모셨다. 구방준은 큰형인 구수준이 죽은 뒤에는 형수가 사는 양근군[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내왕하며 어머니를 모시듯 하였다.
구방준이 40세가 되던 1645년(인조 23) 어느 날, 꿈속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백발노인으로 변하여 “내가 너의 자모(慈母)로다”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어루만졌다. 이에 구방준이 어머니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다가 깨어나, 꿈속에서 만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몽리봉모부(夢裏逢母賦)」를 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죽기 전 자손들에게 ‘충효청렴(忠孝淸廉)’이라는 유훈을 남겼고, 두보(杜甫)의 「북정시(北征詩)」를 읊으면서 눈을 감으니, 사람들이 모두 복이 많은 현인(賢人)이라 칭송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도해정집(蹈海亭集)』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 고마동에 있는데, 표석(表石)에 ‘도해정선생지묘(蹈海亭先生之墓)’라고 써 있다. 묘지명(墓誌銘)은 이기홍(李箕弘)이 지었다.
[상훈과 추모]
구방준이 죽은 후 통천 유림(儒林)들이 그의 효행과 현덕(賢德)을 기려서 나라에 여러 번 효정(孝旌)을 청원하였으나 은전은 받지 못하였다. 김평묵(金平默)이 문집의 발문(跋文)을 썼고, 그의 묘소에 들러 읊은 시가 남아 있다. 유중교(柳重敎)가 지은 「도해정 선생 사실기(蹈海亭先生事實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