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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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𥙿孫 |
이칭/별칭 | 여경(餘慶),소총(篠䕺),광진자(狂眞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진호 |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지역에서 은거하였던 문인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䕺)·광진자(狂眞子)이다. 아버지는 홍순치(洪順致)이고 아들은 홍지성(洪至誠)이다.
[활동 사항]
홍유손(洪𥙿孫)(1431~1529)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바르고 총명했는데, 5세 때 학문에 뜻을 두어 수업을 시작했고, 10세 때에 경전을 통독해 선생들이 이인(異人)으로 대우하였다. 김종직(金宗直)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아 학자로서 문장이 뛰어나 명성을 떨쳤다. 남양 부사가 그의 문장이 능함을 보고 모든 이역(吏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과는 동문생으로 의기투합하여 가장 가깝게 지냈다. 세조의 왕위 찬위(簒位) 사건 이후 벼슬을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며 세속적인 영화를 버리고 뜻을 같이 하는 청담 사림(淸談士林)인 남효온(南孝溫), 이총(李摠), 이정은(李貞恩), 조자지(趙自知), 우선언(禹善言), 한경기(韓景琦) 등과 같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하고 머리에 소요건(逍遙巾)을 쓰고, 시(詩)·주(酒)로 세월을 보내며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사악을 응징하며 사회 정의를 추구하며 지냈다.
이들 학자들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노장학(老莊學)에도 정통하여 학문을 토론하며 세월을 보내니, 이들과 뜻을 같이 하는 청담파 선비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특히 홍유손은 유(儒)·노(老)·장(莊) 외 불(佛)·선(仙)에 대한 문록(文錄)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당시 유교가 국교(國敎)로 되어 있어 노·불은 비판적으로 여기던 시대임에도 노·불 편에 서서 신선도(神仙道)를 즐기며 동료들이 영달을 위하여 관계(官界)로 진출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틈이 있는 대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벗과 더불어 시를 지으며 노래 부르고 춤추며 지냈다. 때로는 촌로(村老)들과 어울려 숙식을 같이 하기도 하고 강론(講論)을 벌이기도 하였다. 서울 장안에 들어와서는 귀족은 찾지 않고 서민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홍유손이 서울에 들어왔다 하면 의외로 귀족 학자들이 찾아와 따랐다. 홍유손이 강론을 펴면 사람들이 무수히 모여들었기에 집권층에서 볼 때는 불온 세력으로 제재의 대상이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영남학파의 조종(祖宗)인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위(趙偉)·남효온 등 석학 거유(碩學巨儒)들이 무수히 배출되고, 이들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조정에 진출하자 훈구파(勳舊派)들이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1498년(연산군 4) 훈구파의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무리가 김종직 제자 일파를 제거하고자 연산군에게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것을 풍자한 글]을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 일당이 실록에 기록하였다고 고해 바쳐 연산군이 대노하여 신진 사류를 대숙청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이 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어 칼로 베는 것]를 당하고 그 제자 및 그를 따르는 신진 사류 수십 명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이 때 홍유손은 죽음을 면했으나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11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풀려나와 포천 지역에서 살았다. 왕이 홍유손의 문장이 특출하다는 말을 듣고 별전(別殿)에서 시와 부를 짓게 하였는데, 그 문장이 절묘하여 탄상(歎賞)을 금치 못하였다 한다.
1510년(중종 5) 친지들의 권유로 진사시에 응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대과(大科)를 보라고 권하였으나 나이가 63세나 되었고 또한 벼슬에 뜻이 없어 응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인 그는 끝까지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찾아오는 벗들과 즐겁게 지냈다.
홍유손은 독신으로 생활하다 76세 때인 1524년(중종 19) 부인을 맞이하여 불정산하 오인포(五仁浦)에서 신혼 생활을 하다가 4년째 되던 해인 1528년(중종23) 80세가 되던 해 아들을 낳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여 아들 이름을 홍지성이라 하였다. 홍지성은 훗날 ‘불정산인(佛頂山人)’이라 불리는 대학자가 되었다. 그 후손이 포천시 내촌면 진목리 오림포에 자작일촌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학문과 저술]
남효온은 『사우록(師友錄)』에서 ‘홍노 선생(洪老先生)’을 세상의 이인(異人)이라 칭하면서, 문(文)은 장자(莊子)와 같고 재주는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저서로 『소총유고(篠䕺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