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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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鎭海 |
이칭/별칭 | 웅천의 임진왜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임진왜란 시기 지금의 창원[진해]에 있었던 전투와 강화 교섭 등의 영향으로 현재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양상
[개설]
임진왜란 시기 웅천[현재 진해]는 일본군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어 개전 초기부터 종전 시까지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음으로써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배경]
임진왜란 이전부터 웅천은 삼포왜란이 발발하는 등 왜구들의 주목을 받은 지역이었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웅천은 일본군이 조선을 쳐들어 올 경우 주 입항지로 활용되었고, 왜성을 쌓을 입지 조건도 좋은 곳이었다. 아울러 일본군의 전쟁 본부가 있었던 부산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진해를 지리적 요충지로 인식하였다.
[경과]
진해[웅천]는 부산에 있던 일본군 본영과 가까워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었다. 조선으로서도 일본군 본영이 주둔하고 있던 부산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이 지역을 점령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합포 해전과 웅포 해전, 안골포 해전 등 임진왜란 초기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해전이 벌어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함락된 이 지역에 장기 주둔한 일본은 강화 교섭 기간을 이용하여 왜성을 쌓아 자신들의 근거지와 보급 기지로 활용함은 물론 조선 수군의 활동을 견제하였다. 동시에 강화 교섭 기간 중에는 웅천 회담을 두 차례나 열어서 명나라 주요 인사들의 방문도 이루어져 이 지역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도 되었다.
정유재란 당시에도 일본의 주 침공로로 활용되어 웅천의 안골포를 선점한 일본군은 서진을 위한 근거지로 활용하였다. 역시 이곳에서 또 한 번의 해전이 벌어지는 등 진해에 대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인식은 매우 높은 상태를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진해는 임진왜란 기간 내내 일본군이 장기 주둔하였으며, 이는 이 지역 주민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입국한 곳이기도 하고 조선의 도공이 붙잡혀 가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주민들의 설화가 내려오면서 삶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전쟁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결과]
진해 지역에는 임진왜란 전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첫 번째 출동에서 두 번째 해전이 있었던 합포 해전지, 임진년과 정유년에 각각 한 차례씩 해전이 벌어진 안골포 해전지, 그리고 1593년에 근 한 달간 7차례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던 웅포 해전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울러 일본군이 주둔하여 축성한 후 장기간 요새로 활용한 각종 왜성들은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여기다가 기존 조선 수군이 쌓은 여러 가지 진보·읍성도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이 활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기타 임진왜란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 등이 다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