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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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斤谷里遺蹟 |
이칭/별칭 | 근곡리 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근곡리 56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시환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9년 12월 20일 - 마산 근곡리 유적 경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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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9년 12월 21일 - 마산 근곡리 유적 경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종료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8월 21일 - 마산 근곡리 유적 경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시굴 조사 시작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9월 19일 - 마산 근곡리 유적 경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시굴 조사 종료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3월 18일 - 마산 근곡리 유적 경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시작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9월 30일 - 마산 근곡리 유적 경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종료 |
현 소재지 | 마산 근곡리 유적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근곡리 56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 김해 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주거지|고분 |
면적 | 5,810㎡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근곡리에 있는 삼국 시대 주거지 유적.
[개설]
마산 근곡리 유적은 1999년부터 2004년에 걸쳐 지표 조사, 시굴 및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9년 12월 마산시 진동 우회 도로 신설 공사 예정 구간에 대한 지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확인되었고, 2002년 8월 경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지표 조사에서 확인되었던 유적에 대하여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본격적인 발굴은 이 지역 일대 5,810㎡에 대하여 2004년 3월 18일부터 동년 9월 30일까지 경남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위치]
마산 근곡리 유적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근곡리 56 일대에 있다. 옥녀봉[181m] 남쪽 끝자락 구릉에서 서북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한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대부분은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었고, 구릉 남쪽 정상부는 매실 과수원으로 조성되었다. 남서쪽으로 뻗은 구릉의 정상부는 편평한 대지가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며, 구릉의 안쪽인 서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면서 도로와 연결된다. 유적의 외곽 북쪽에는 울창한 산림과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는 공동묘지가 있으며, 동쪽에는 민가가 형성되어 있고 조사 구역에서 민가 쪽으로 급경사를 이룬다.
[형태]
주거지는 구릉의 경사면에 설치된 ‘반구덩식’으로 평면 형태는 원형을 기본으로 타원형과 장타원형의 형태를 가진 것과 장방형의 형태를 가지는 것 등이 있다. 유구가 조성된 구릉은 풍화가 급속히 진행된 결과 아랫부분은 삭평되어 아래쪽 벽의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유구는 대부분 독립적으로 확인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중복된 예도 있고, 장축이 10m에 달하는 대형 주거지도 적지 않다.
주거지 내부 시설로는 벽구나 기둥 구멍, 화덕 자리가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체 조사된 유구 가운데 일부 주거지에서만 벽구와 기둥 구멍이 확인되었다. 벽구는 주거지의 경사면 벽 바로 아래에서 확인되거나 벽에서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나타나며, 단면이 ‘V’자 형으로 좁은 것과 ‘U’자 형태로 다소 넓은 것도 있다. 벽구의 출현 빈도와 형태에서 주거지의 선후 관계나 크기 등과 관련된 차별성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주거지 내부에서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가진 기둥 구멍이 확인되는 것과 벽면을 굴착하여 기둥 구멍이 확인되는 것 등이 있다. 이것은 주거지의 상부 구조를 구성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상세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또한 주거지의 바닥은 생토면 풍화 암반층을 그대로 사용한 것과 면이 불규칙한 풍화 암반층 상부에 적갈색 점토를 한 벌 깐 후 불을 질러 바닥을 단단하게 다진 것도 있으며, 일부 바닥에서 목탄이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1. 4호 주거지
유적의 북동쪽 상단부 높이 23m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북쪽으로 2m 정도 떨어져 2호 주거지가 위치하며, 남동쪽 10m 정도에 10·11·12호 주거지가 위치한다.
주거지는 잔존 상태로 보아 명황갈색 풍화 암반층을 ‘ㄴ’자 모양으로 굴착하고 조성되었으며,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추정된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900㎝, 너비 260㎝, 깊이 82㎝이다. 벽은 직벽에 가까운 사벽이며 내부 퇴적토는 14개 층으로 나누어지는데, 퇴적 양상으로 보아 고의적인 폐기가 아닌 자연 퇴적으로 경사가 높은 북동쪽에서 비스듬하게 퇴적된 양상이다. 주거지 내부 시설로 북쪽 상단부 벽면 아래에서 부분적으로 벽구가 확인되며, 벽구의 폭은 12㎝ 내외이고, 깊이는 3㎝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주거지 내부 바닥은 주로 생토인 황갈색 풍화 암반층을 그대로 사용했고, 황갈색 풍화 암반층 위에 적갈색 점질토를 한 벌 깔은 것이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또한 주거지의 내부 바닥 중앙 지점에서 다량의 소토와 목탄이 세로 약 1m, 가로 약 5m 정도의 일정한 범위를 가지면서 확인되는 것을 볼 때, 불을 사용하여 취사 및 난방을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주로 바닥면에서 대략 20㎝ 이상 뜬 채로 적갈색 연질의 계란형 토기와 작은 항아리, 회청색 경질의 뚜껑, 손잡이 조각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확인되었다. 이는 상부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선반 등과 같은 시설이 폐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2. 6호 주거지
유적의 북쪽 중앙부 해발 22m 지점에 위치하며, 후대에 5호 주거지 남쪽 일부분을 파괴하고 조성되었다. 남동쪽 3m 지점에 7호 주거지가 위치하며, 경사면 아래쪽은 경작으로 인하여 주거지 절반이 유실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나, 잔존 상태로 보아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추정된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10m, 너비 5.23m, 깊이 1m이다.
주거지는 명황갈색 풍화 암반층을 ‘ㄴ’자상으로 굴착하고 조성되었으며, 벽은 직벽에 가까운 사벽이다. 내부 퇴적토는 크게 2개 층으로 나누어지는데, 퇴적 양상으로 보아 고의적인 폐기에 의한 퇴적이 아닌 자연 퇴적으로 파악된다.
주거지 내부 시설로는 상단의 벽을 따라 바닥에서 부분적으로 벽구가 확인된다. 이들은 주거지 북쪽 벽면 내부를 1/2쯤 파고 들어가 설치되었는데 폭은 10㎝ 내외, 깊이는 4㎝ 정도로 흔적만 남아있다. 또한 바닥 벽기둥 구멍의 직경은 20㎝ 내외이며, 깊이는 벽구 바닥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깊은 편이다. 이것은 주거지의 상부 구조를 구성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상세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주거지 내부 바닥은 황갈색 풍화 암반층 위에 적갈색 점질토를 이용하여 바닥을 정지하였는데, 전면에 고르게 깔려 있지 않고 일부분에서만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이는 다른 바닥에 비해 많이 굴착된 부분만 메웠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유물은 주거지 내 북서쪽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는데, 4호 주거지와 비슷하게 바닥에서 대략 20㎝ 정도 뜬 채로 큰 항아리류와 연질의 작은 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류가 파쇄된 채로 출토되었다.
3. 7호 주거지
유적의 북쪽 중앙부 해발 22m 지점에 위치하며, 북서쪽 3m 지점에 6호 주거지, 북동쪽 7m 지점에 5호 주거지가 위치한다. 유구는 밭 경작으로 인하여 주거지 상·하단부 일부가 삭평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명황갈색 풍화 암반층을 ‘ㄴ’자상으로 굴착하고 조성되었으며, 잔존 상태로 보아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추정된다.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12.2m, 너비 4.4m, 깊이 40㎝이다. 주거지 중앙부에는 아래로 15㎝ 정도 낮아지는 부분이 확인되는데 내부에서 소토와 목탄이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7호 주거지와 관련된 시설로 판단되는 부정형의 구덩이 서쪽 아랫단에서 확인되었고 내부에는 소토와 목탄이 채워져 있었으나 깊이는 20㎝ 내외로 얕은 편이다.
잔존하는 동쪽 벽은 직벽에 가까우며 내부 퇴적토는 4개 층으로 경사가 높은 북동쪽에서 비스듬하게 퇴적되었다. 주거지 내부 시설로는 상단부 벽을 따라 바닥에서 부분적으로 벽구가 확인되는데 폭은 14㎝ 내외, 깊이는 8㎝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다.
주거지 내의 바닥에서는 황갈색 풍화 암반층 위에 명갈색 점토를 한 벌 깐 후 불을 질러 단단하게 한 소결흔이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주거지의 중앙부에는 조리나 난방을 위한 시설로 추정되는 돌을 두른 형태[위석식]의 화덕 자리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주변에서 소토와 목탄이 다량으로 확인되는 것을 볼 때 불을 사용하여 취사 및 난방을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의 출토량은 빈약한 편으로 복원되지 않는 주둥이 부분 조각, 손잡이 등 적갈색 연질 토기 조각 및 경질 토기 조각이 바닥에서 뜬 채로 확인되었다.
[현황]
마산 근곡리 유적은 2004년 경남 문화재 연구원의 발굴 조사 결과, 삼국 시대 움집 터 21동, 기둥 구멍군 6동, 삼국 시대로 추정되는 돌방무덤 1기가 조사되어 주로 삼국 시대 주거지가 집중 분포한 취락 유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은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대개 파손되거나 파편으로 출토되었다. 생활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는 연질 토기나 경질 토기들은 무덤에 부장된 토기들처럼 기종이 다양하거나 기형 변화가 뚜렷하지 않아서 유물의 형식이 세분되지 않는다. 즉, 생활 유적에서 출토된 일상용 토기들은 장식적 측면보다 기능적 측면이 강조되므로 각 기종의 형태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근곡리 유적의 주거지 형태나 위치, 출토 유물 등으로 당시 이 유적의 형성과 역할, 주민들의 뚜렷한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들이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인지 아니면 바로 앞에서 연결되는 바다에서 활동한 세력인지 규정하기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유적의 형성 시기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은 추정도 가능하다.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여러 가야 중에 안라국을 함안에, 고자미동국을 고성에, 구야국을 김해에 비정한다면 이곳은 이들 사이의 중심에 해당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나해이사금조 및 같은 책 물계자전에 등장하는 포상팔국 중 골포국을 창원, 칠포국을 칠원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들은 바다에 접했으므로 옛날 진해로 불린 삼진 지역을 포함하여 형성된 소국이 칠포국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산 근곡리 유적은 진동만에 인접한 해안 지대에 위치하며, 함안군과 고성군이 둘러싸고 있다. 이 지역은 함안의 아라가야와 고성의 소가야의 접경 지역에 해당한다. 특히 진동만의 긴 협곡의 구릉상에는 신촌리 고분군, 연동 고분군 등 가야 시대 고분이 밀집하여 분포한다. 이러한 유적들을 감안하면 문헌에 나타나는 포상팔국 중 칠포국을 진동만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국으로 비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