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10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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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정헌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의 정월 세시 풍속.
[연원]
음력 정월달의 행사로서 줄다리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마산의 줄다리기는 처음에는 창원 지역에서 행해졌던 것인데 1899년 5월 1일 마산포의 개항으로 창원 감리서(昌原監理署)가 마산 지역에 설치된 이후 1913년 음력 정월 보름날 밤 마산포(馬山浦) 완정(元町)[지금의 남성동(南城洞)]의 매축지(埋築地)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진영 나누기]
이 경기는 사방 2~30리 안의 여러 마을에서 줄을 가지고 모여 드는 방향에 따라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었다. 동군은 동방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청룡기를 세우고, 서군은 서방의 수호신을 표시하는 백호기를 세웠고 양 진영에서는 각기 농신기(農神旗)나 수농신(守農神), 수곡신(守穀神)을 상징하는 갖가지 깃발들이 휘날렸다. 이 경기에 이기고 지는 것은 바로 농사의 풍작과 흉작에 관계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에 양쪽 진영에서는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 서로 많은 응원단을 모으려고 술을 사서 보내기도 하였다.
[줄 만들기]
이 경기에 사용되는 줄은 직경이 약 3척[약 90㎝], 둘레가 약 9척[2m 70㎝] 내외였는데 혹 줄이 끊어져서 경기에 지는 일이 생길까봐 ‘마니라 로프’나 ‘와이야 로프’ 같은 질기고 단단한 것을 섞어서 만들었다. 동서(東西) 양군에서 만든 줄의 길이는 각기 100간(間)[약 182m]이 되었고, 앞머리에는 양쪽 줄을 얽어맬 수 있도록 용두를 달았다. 또 원 줄에는 수십 가닥의 ‘지네발’이라고 하는 보조 줄을 달았는데 이 보조 줄 중 큰 것은 원 줄의 크기만한 것도 있었는데 이것을 만드느라 1,000원(圓)이 넘는 비용을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줄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모두 관공서나 일반인의 찬조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양군에서는 각기 경기가 시작될 10여일 전부터 청소년단을 조직해서 ‘농정 농정’을 외치며 관공서와 개인 집들을 다니면서 찬조금을 거두었다.
[규모]
정월 보름의 경기날이 오면 그 전날인 음력 정월 14일 해지기 전에 양쪽 진영에서는 각기 줄을 끌고 와서 양쪽 줄을 얽어맬 수 있는 머리를 경기 장소의 중심지에 두고 동서로 줄을 놓았는데 그 길이는 200여 간[약 364m]이었다. 줄을 갖다 놓은 양 진영에서는 혹시나 상대방에서 자기네 줄을 해치는 일이 생길까봐 밤을 새워 지켰다.
보름날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주위 사방의 여러 부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줄 당기는 사람수는 양쪽을 합해서 약 1만 2~3,000명 정도나 되었다. 응원자나 관람객도 거의 같은 정도였다.
[놀이 방법]
경기 시작의 신호가 울리면 양쪽 군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줄을 당겼고, 응원단은 소리 질러 자기편을 도왔다. 경기 도중에 혹 보조 줄이 끊어지는 일이 생기면 다시 묶었다. 몇 번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승패를 나누기까지는 보통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승패는 불과 2~3간[약 3.5~5.5m] 정도로 끝나지만 불과 2m 이내로 끝날 때도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이긴 쪽에서는 축제단을 만들어서 온 시내를 누비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승리를 외치면서 밤이 지새도록 놀았다.
줄다리기를 위해 만든 줄은 한번만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줄은 경기가 끝난 다음 날 경매에 부쳐져서 5~600원 정도의 값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팔렸다. 이 줄을 산 사람은 이것을 푼 뒤에 새끼, 가마니 그 밖에 여러 다른 용도로 이용하였다.
또 경기가 끝난 뒤에 동서 양쪽의 줄을 얽어 맨 곳을 푸는 일은 경기에서 패배한 쪽에 맡아서 하였다. 하지만 이 줄을 푸는 사람은 3년 이내에 자기나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위험한 사고가 생기거나 병이 들어 죽는다는 괴상한 미신이 있어서 모두가 줄 푸는 일을 꺼려하였다. 그러므로 경기에서 패한 진영에서는 줄을 푸는 사람을 선정하는데 매우 애를 먹었고, 어떤 때는 며칠이고 줄을 풀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해 둔 일도 있었다.
[변천 과정]
이 줄다리기는 1913년부터 1919년까지 해마다 원정 매축지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일제의 압박으로 5년 동안 중지되었다. 1924년 다시 줄다리기가 허가되었지만 이때는 이미 매축지에 집들이 들어서서 여기서 경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4년에는 원정·만정[동성동]·수정[수성동]의 큰 길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고 그해 음력 정월 17일 밤에 조선 식산 은행 지점[지금의 제일 은행 마산 지점] 앞을 중심지로 해서 개최되었다. 이듬해도 역시 이곳에서 개최되었지만 당시 줄다리기 기간 동안에는 모든 차량이나 사람이 통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는 1926년부터 줄다리기 행사를 금지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만약 개최하려면 공설운동장에서 하라고 종용하였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줄다리기는 반드시 동네 중심지에서 개최하는 풍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지역 유지들과 관리들이 책임지기로 하여 식산 은행 지점 앞에서 계속할 수 있도록 신청한 결과, 겨우 밤이 아닌 낮 시간에 경기를 하고 그것도 해가 지기 전에 모든 경기를 끝마쳐야 한다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 1926년에는 정월 19일 낮에 개최하였다.
이 날의 낮 경기는 예전에 볼 수 없는 많은 관람객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그 수는 3만 명을 헤아렸다. 이 식산 은행 지점 앞에서 치루어진 경기는 동쪽 길이 다소 경사가 있는 지리적인 이점으로 동군이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향토 민속인 줄다리기는 1927년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