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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낙동강 전투의 격전지 [한국전쟁 전반기 최후의 보루 낙동강방어선]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의 전개과정에서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여 반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쪽으로 밀려나 긴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하고자 최후의 보루로 설정한 것이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낙동강을 지키기 위해 한국군과 유엔군은 각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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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리1리 씩실마을은 낙동강의 범람에 의해 형성된 승호와 비슬산 자락의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자연환경이 준 마을 이름〕 삼리1리가 속해 있는 논공읍은 고려 이래로 성주군 노장면에 속해 있다가 1906년에 와서 행정구역의 변동과정에서 소속이 현풍군으로 바뀌었다. 이후 1914년 노장면의 중리동, 내리동, 외리동을 중심으로 하고 진두동까지 합쳐 달성군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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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의 지명은 자연을 배경으로 그곳에 살았던 주민들의 삶의 자취로서 역사적 산물이며 조상들의 생활과 정신이 반영된 문화유산이다. 지역의 언어로서 자연환경과 역사, 지리, 생활, 문화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삼리] ‘삼리’라는 지명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의 통폐합과정에서 대구부와 현풍군을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개편할 때 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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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실마을 뒷산 너머에 있는 안건마을의 북동쪽 구릉 자락에는 논공읍의 낙동강 일대 고분군 가운데 가장 숫자가 많은 고분이 조성된 지역이었다. [달성군의 고분군] 삼리1리 씩실마을 지역은 서쪽을 흐르는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서는 신라의 산성과 고분군이 확인되며, 강 건너 서쪽 지역에서는 대가야의 산성과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 신라와 대가야 세력이 서로 대치하면서 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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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제방공사를 통해 옥토로 변한 논공들 〔홍수 피해로 거친 밭이었던 논공들〕 낙동강 7백리 주변은 대표적인 홍수 피해를 입는 지역이었다. 그중에서도 달성군의 논공일대는 거의 매년 피해를 입는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특히 삼리1리 씩실마을은 한해에도 두세 번 씩 홍수 피해를 입어 그 사는 형편이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우리 마을이 과거에는 홍수 때문에 먹을 게 없었어요. 1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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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이 만든 씩실마을의 젖줄기 승호 [달성군의 낙동강, 배후습지를 형성하다] 삼리1리 씩실마을 곁을 흐르는 낙동강 일대에는 배후 습지 등 범람원 미지형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다. 배후습지는 갈대 등 많은 정수식물이 살고 있으며, 홍수 방지, 수질정화, 지하수 공급 등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낚시, 조류관찰, 사진 촬영 등의 여가 활동의 가치를 지낸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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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는 고대 이래로 낙동강을 이용하는 교통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낙동강 건너 고령과는 왕래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그러한 교통의 중심에 무계나루터가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달성과 고령을 이어주는 무계진〕 낙동강 변에 위치한 삼리 1리 씩실마을에서 강을 건너면 바로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다. 그 무계리에는 예로부터 나루터가 있어서 두 지역을 왕래하는 교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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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리1리 씩실마을을 조성한 양촌 이난미는 당시 성주지역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한강정구와 함께 회현서원에 배향되고 있는 광산이씨 삼처사 집안 출신이다. 〔한강정구와 삼처사〕 조선중기 한강 정구는 동강 김우옹, 송암 김면 등과 더불어 이황과 조식을 학문을 접하면서도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이 살았던 성주 일대가 낙동강의 중간 지역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배경으로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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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살림을 책임지는 부녀회장 박태연 부녀회장 박태연은 성주군 수륜면이 고향이다. 이 마을과 삼리 간에는 종종 혼사가 이루어 져 왔던 인연이 있던 곳이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만했던 수륜에서 친척분의 중매를 통해 삼리로 시집을 왔다. 신랑은 6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다. 고향에서 벼, 보리농사를 하다가 시집을 오니 수박농사가 한창이었다고 한다. “양반 동네라고 시집을 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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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굳건한 버팀목 이달국 이장 〔수박농사의 기운을 타고〕 낙동강 제방공사가 마무리되고, 수박농사가 막 시작되는 시기에 태어난 이달국이장은 달성군의 대표적인 젊은 이장이다. 삼리에서 태어나 인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구로 나아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부모님의 권유 등을 배경으로 귀향한지 17년째 되는 전문 농사꾼이다. 〔이장으로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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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형편을 펴게 해준 논공 수박 [달성군에서 처음 수박농사를 시작하다] 달성군 논공읍의 논공들은 1962년 낙동강 제방공사를 통해 옥토로 바뀌었다. 그런 가운데 밭농사만으로는 경제적 형편이 개선되지 않자 주민들은 마을의 소득 증대에 도움이 될 만한 작물을 찾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재배된 것이 논공수박이다. 수박은 1960년대 중반부터 재배가 시작되어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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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화합을 주도하는 노인회장 이달우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어린 시절〕 삼리1리 씩실마을은 광산이씨의 집성촌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이후 양촌 이난미에 의해 마을이 형성된 이래로 지금까지 광산이씨들이 마을의 중심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예전부터 다른 성씨도 일부 들어와 거주하고 있는 이 마을에서 이달우 회장은 지난 2015년부터 노인회장을 맡아 마을의 화합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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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으로 이룬 부자 마을 [마을 환경개선사업의 결실을 보다] 삼리1리 씩실마을에서의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 새마을 운동에서 승호교 건설과 안길확장, 담장 개량 등의 환경개선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도자 이영곤을 이어 새로운 지도자로 이숙현(李淑鉉)이 선출되었다. 당시 새마을지도자는 마을 집안어른들의 추천으로 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1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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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의 산증인 이산출 〔새마을운동 시범부락이 된 삼리1리〕 삼리1리 씩실마을은 토마토와 양배추 농사를 통해 부촌마을의 명성을 얻은 곳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낙동강의 홍수 피해로 인해 가난을 면치 못하던 마을이었다. 이후 1960년대 낙동강제방공사와 경지정리를 통해 논공들이 비옥한 안전답이 되었고, 수박농사를 통해 마을의 형편이 나아지게 되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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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에 이어 부를 가져다 준 토마토 [수박에서 토마토로 전환하다] 삼리리에서 나는 농산물 가운데 수박 못지않게 유명한 작물이 토마토이다. 수박농사가 한창 전개되는 가운데 토양의 영양공급의 어려움과 일손 부족 등의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수박을 대체할 작물을 고심하던 가운데 토마토를 선택하여 재배하였던 것이다. 논공지역에서 토마토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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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곡과 양촌을 기리기 위해 만든 승호서당 〔이난귀, 이난미 형제를 기리는 재실 〕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은 비슬산자락이 뻗어 내려와 만들어진 나지막한 산과 낙동강이 만든 승호(承湖)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그래도 지명을 승호동이라 하기도 하였다. 정남향인 마을의 중심에 양촌고택이 있고 그 뒤쪽에 자리한 것이 승호서당이다. 승호서당은 조선중기 성주지역의 대표적인 유림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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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 곁에 먼저 자리잡은 동호 이서 〔삼처사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성주군 고탄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광산이씨 집안에서 강을 건너와 승호 곁에 먼저 자리를 잡았던 인물은 동호 이서였다. 이서는 당대 성주지역에서 학문과 효행으로 유명하였던 삼처사 가운데 한분인 모재 이홍우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한강 정구의 뜻을 이어〕 이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함을 보였다. 아버지 형제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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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교 건설로 마을과 논공 들을 이어 [달성군 새마을운동의 선두주자] 새마을운동은 1960년대 정부에 의해 전개된 재건국민운동 등의 성과를 돌이켜 보는 가운데 시행된 것이다. 당시 산업화의 여파로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농촌의 개발을 위해 근면·자조·협동의 기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범국가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소득증대 부분이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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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실마을 주민들의 삶과 승호 〔마을주민과 함께한 승호〕 삼리 1리 씩실마을에는 낙동강이 만든 승호(承湖)가 있다. 이웃 금포천에서 흘러 들어온 물이 승호를 지나 위천 쪽의 낫늪을 통해 낙동강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이름을 승호라 하였다. 또는 마을이름을 빌려 ‘씩늪’이라고도 한다. 마을 주민들에게 승호는 젖줄기와 같았다고 한다. 식수로 쓰기도 하고, 농사철에는 인근 밭에 물을 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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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실마을을 만든 양촌 이난미 〔사촌 동호 이서의 권유로 낙동강을 건너〕 지금부터 400여년전 당시 성주군 고탄리에서 강을 건너와 승호(承湖) 위쪽에 집을 짓고 터를 잡은 이는 이서였다. 한강 정구의 제자였던 그는 스승의 죽음 이후 관직을 마다하고 승호 곁으로 이주해 와서 호를 동호(東湖)라 하고 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서는 낙동강과 승호, 그리고 비슬산 자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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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실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양촌 고택 [볕이 드는 곳에 처음 터를 잡은 양촌 고택] 양촌고택은 광산이씨의 세거지였던 성주군 고탄(현 고령군 성산면)에서 이른바 광산이씨光山李氏 삼처사三處士중의 한분으로서 낙강칠현으로 이름을 떨친 육일헌 이홍량의 차남인 이란미가 이주해 와 지은 집이다. 1610년(광해군 2년)에 건립된 이 집은 정남향인 마을의 한가운데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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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고택을 지키는 종손 이영수 〔광산이씨 중파 14대손으로 태어나다〕 삼리1리 씩실마을은 당시 성주군 소야면 고탄리(현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에 은거한 광산이씨 한림공파의 후손인 양촌 이난미가 낙동강을 건너와 자리 잡은 집성촌이다. 이러한 양촌 이난미의 후손들을 중파, 또는 양촌공파라 한다. 즉 광산이씨 양촌공파라 함은 양촌 이난미가 성주 고탄에서 달성군 논공 승호 옆에 와서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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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영을 추모하는 임호재 〔씩실마을의 재실들〕 삼리1리 씩실마을은 고령군 성산면 고탄동에서 건너온 광산이씨 일족들에 의해 형성된 마을이다. 그로 인해 마을에는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들을 기리는 재실등을 많이 건립하였다. 1970년을 전후하여 위은(渭隱) 이세환의 추모재사인 비락재(琵洛齋), 이달은과 이달민의 추모재사인 서락재(棲洛齋), 이당의 추모재사로 광거재(廣居齋)등이 건립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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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배의 상징 신사가 마을 뒷산에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신사정책을 강화하였다. 신사정책은 치안 유지와 더불어 각종 종교단체를 전쟁에 협력시키는 수단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관민일체(官民一體)로 조선 민중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하는 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다. 이를 위해 1936년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을 통해 ‘일읍일면신사’(一邑面一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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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양배추 [양배추, 부를 가져다 준 작물] 논공수박으로 명성을 떨쳐 나가다가 토질 문제와 일손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할 대체작물을 찾던 가운데 토마토와 함께 선택된 것이 양배추이다. 양배추 농사는 토마토와 마찬가지로 벼농사를 끝내면 들판에 거름을 투입하고 하우스를 지어 양배추농사 지을 준비를 하게 된다. 서양에서 올리브, 요구르트와 함께 3대 장수식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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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농사를 주도하는 안건마을 토박이 정병만 작목반장 〔부친을 따라 마을로 이주〕 씩실마을을 부촌으로 만들어준 대표적인 작물이 토마토이다. 이러한 토마토 농사의 중심에‘토마토작목반’이 있다. 정병만은 일찍부터 토마토 농사에 종사해 오면서 작목반 반장으로서 토마토 재배농가간의 기술교류와 판매증진에 힘을 쏟고 있다. 1958년생인 정병만 반장은 4살 때 토목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