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B010106 |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씩실마을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슬곡과 양촌을 기리기 위해 만든 승호서당
〔이난귀, 이난미 형제를 기리는 재실 〕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은 비슬산자락이 뻗어 내려와 만들어진 나지막한 산과 낙동강이 만든 승호(承湖)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그래도 지명을 승호동이라 하기도 하였다. 정남향인 마을의 중심에 양촌고택이 있고 그 뒤쪽에 자리한 것이 승호서당이다.
승호서당은 조선중기 성주지역의 대표적인 유림으로서 회연서원 향현사에 배향된 인물인 이른바 광산이씨 삼처사 가운데 육일헌 이홍량의 아들인 슬곡 이난귀와 양촌 이난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재실이다.
〔승호서당의 구조〕
승호서당이란 이름은 마을 앞의 승호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당시는 지금 보다 더 큰 못으로서 위천 지역의 늪과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해서 이름을 승호라 했다. 1795년(정조 19년)에 건립되었으며, 1973년에 재건하였다.
마을 뒷산 높은 곳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은 승호서당은 서쪽에 문이 있기도 하고, 양촌고택 뒤로 해서 담장사이에 난 좁은 문을 통해 다니기도 하였다. 평면은 어간(御間)의 2間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앞쪽에는 반간 규모의 앞마루를 두었으며 기둥은 앞쪽과 뒤쪽의 가운데 기둥만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다. 지붕 구조는 대들보 위에 원형의 판대공(板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세 줄로 걸어 만든 삼량가(三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다.
〔슬곡 이난귀와 승호동〕
성주의 삼처사 가운데 육일헌 이홍량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난귀는 9세때 부친을 여의고 동생 이난미와 함께 고모부인 한강 정구가 있는 성천에서 잠시 살기도 하였다.
성천에 머무르면서 정구의 제자가 된 이난귀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더욱 학문에 힘썼다. 어머님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성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구와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의 대립이 심각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 이창록사건이다. 이 사건은 성주지역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학파 간 다툼으로서 정구를 중심으로 한 학파의 형성에 따른 갈등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동안 성주출신들은 과거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이난귀 또한 그런 연유로 급제하지 못한 것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친을 잊지 못하고 봉양하지 못하였음을 슬퍼하면서 모친에 대해 지극한 효를 다하였다.
이난귀는 과거를 그만 둔 뒤에도 학문에 전념하였다. 소학을 강조하였고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대할 때 허투루 하지 않았다. 조용한 곳을 찾아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성주군 가리현 고탄에서 낙동강을 건너 삼리의 승호 부근으로 와서 집을 짓고 슬곡이라 하였다. 1644년 삼리에서 61세로 별세하니 성주군 가리현 북쪽 용기동에 장사지냈다.
〔양촌 이난미와 승호동〕
승호동이라는 마을을 이루는 데 주도적인 역할은 양촌 이난미가 했다.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산과 땅을 매입하고 갈대로 우거진 승호 주변을 개간하여 삶의 터전으로 만든 것이다.
양촌고택에서 승호서당으로 가는 오르막 길 옆에 양촌 이난미의 가묘유지비(家廟遺址碑)가 서 있다.
한때 승호서당에서도 글공부를 했다고 한다. 주로 광산이씨 집안사람끼리 모여 슬곡과 양촌의 학풍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참고 문헌〕
李禹鉉 主幹, 『光山李氏世稿 國譯全』 (西大邱印刷所, 1986)
달성마을지편찬위원회편 『달성마을지』 (달성문화원, 1998)
『대구의 뿌리 달성』 (달성문화재단, 달성군지편찬위원회, 2014)
〔정보제공자〕
이영수 (남, 1939년생,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1리 씩실마을 광산이씨 중파 14대 종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