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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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馬里 獨立萬歲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용철 |
[정의]
1919년 4월 21일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에서 발생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21일 강원도 영월군 양변면[지금의 주천면] 금마리에서 발생하였다.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은 금마리에 거주하는 38세의 농부 박광훈이 주도하였다. 박광훈은 4월 20일 오전 9시경, 자신의 집에서 이병익, 이용헌, 박수영, 박재호 등에게 “이웃 군에서는 모두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친다. 우리들도 구한국 신민으로서 만세를 외쳐야 할 의무가 있다. 운 좋게 군수가 온다고 한다. 군수에게 권고하여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도록 하자.”라고 설득하였다. 이병익 등은 모두 찬성하였으며, 이에 박영훈의 집에서 ‘독립 만세를 함께 부른다’는 승낙서를 작성하였다. 이후 박광훈과 이병익은 탁은상, 남상은, 박수동, 조종협, 홍봉관 등에게도 독립 만세를 권유하여 서명을 받았다.
[경과]
4월 21일 강원도 영월군 양변면 금마리에 영월군수 석명선이 농사 강연 등 민심 지도를 위하여 왔고, 오전 11시경 강연을 마치고 군서기, 구장, 면서기 등 수행원 3명과 제천가도인 조상근 집 앞 노상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박광훈을 중심으로 한 30~40명의 주민들은 군수 일행을 뒤쫓아가 에워싸며, 이병익이 구한국 국기를 군수의 손에 들려 주었다. 직후 박광훈 등은 군수에게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라.”며 압박을 가하였다. 군수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박광훈 등의 강요에 의하여 결국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운동이 확대되어 70명의 군중도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박광훈은 이병익과 함께 군수에게 독립 만세 명부에 서명 날인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군수는 서명을 한 뒤 도망치듯 현장을 떠났다.
[결과]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은 오래갈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헌병분대 헌병들이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출동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박광훈 등 주도 인사 7명이 체포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뒤이어 헌병대 수비대까지 시위대에 대한 탄압에 나서 23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박광훈 등 17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운동을 주도한 박광훈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금마리 독립만세운동은 영월 지역에서 발생한 대표적 3·1운동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