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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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益時 |
영어음역 | Gim Iksi |
이칭/별칭 | 교병(敎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윤오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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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 926[현 복성리] |
성별 | 남 |
생년 | 1885년 9월 12일 |
몰년 | 1943년 6월 15일 |
[정의]
일제강점기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885년 9월 12일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현 복성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때 약목장터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일본 군경(軍警)에게 계획이 탄로나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활동사항]
만주 용정(龍井)에서 6년 반을 지내다 1918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1919년 3월 11일 칠곡군 북삼면 숭오동의 아우 김익주(金益周) 집에서 기독교 신자인 안도수(安道秀)를 만나, 북삼·약목 양 지역의 기독교도들이 나서 만세시위를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김익시는 약목면 자택에 돌아가 신도들과 의논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3월 12일, 복성동 교회 및 최전화(崔塡和) 집에서 박상하(朴相夏)·배일언(裵日彦)·한종호(韓鐘浩) 등과 협의하여 3월 14일 약목 장날에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대형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하던 중 일본 군경에게 발각되어 동지 6명이 함께 검거되었다. 4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5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형을 받았다. 다시 고법에 상고하였으나 6월 7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