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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805
한자 義兵
영어의미역 Righteous Arm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가 일어나 조직하는 자위군(自衛軍)이자 민군(民軍).

[개설]

의병의 역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것은 임진·병자 양란 의병과 조선 말기의 의병이다. 특히 조선 말기 의병은 항일 독립운동의 원류인데, 칠곡·인동 지역에서는 산남의진에 참여한 장준호·장성우·손기찬(孫基瓚) 등이 있다.

조선 말기 의병은 1895~1896년의 제1차 의병전쟁(전기의병, 을미의병)과 1905~1910년의 제2차 의병전쟁(후기의병,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차 의병전쟁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경우 안동부 관할의 14개 군현에서 양반 유생들이 창의하였으며, 그 외 김산·진주 등지에서도 창의하였다. 제2차 의병전쟁은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응하여 1905년 9월부터 삼남 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1906년 민종식 홍주의진, 영천의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삼남의진, 영해 신돌석의 영릉의진 등이 창의하였고,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의병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경기도 등 각지에서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칠곡군의 의병]

칠곡군의 경우, 조선 말기 의병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결성된 의병부대는 없다. 제1차 의병전쟁기에 이웃 고을 김천에서 창의한 김산·선산·상주의 양반 유생들이 결성한 김산의진에 참여한 칠곡 출신의 의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제2차 의병전쟁기에는 영천에서 결성된 산남의진에 참여한 장준호·장성우·손기찬(孫基瓚) 등이 칠곡 출신이다.

회산(回山) 장준호(張俊灝)[1888~1939]는 칠곡군 가산면 학상리 출신이다. 인동장씨 장희학(張希鶴)의 장남으로 태어나 18세인 1906년 4월 영천에서 결성된 산남의진(山南義陣)[1906. 4~1908. 7]에 참여하였다. 1906년 7월에 창의장 정용기가 피체된 뒤 임용상부대(林龍相部隊)의 참모, 1907년 4월 대장 정용기가 재기하자 상영집사(上營執事), 9월 대장 정용기가 전사한 뒤 부친 정환직이 총대장에 취임하자 장준호는 장성우·손기찬(孫基瓚) 등과 함께 인동·칠곡 지방에서 신병과 무기를 모집하였고, 재편성된 산남의진의 참모집사(參謀執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07년 8월 산남의진이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서울進功作戰)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하는 과정에서 장성우는 칠곡으로 장준호는 선산으로 파견되어 북상을 준비하였다. 1907년 12월에 대장 정환직(鄭煥直)이 순국한 뒤 최세윤(崔世允)이 3대 대장으로 이끌던 산남의진은 1908년 7월 해산하였다. 그러나 장준호는 각처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감행하며 일본 군경에 저항하던 중 1909년 2월 영천에서 체포되었다. 1909년 11월 절도 및 폭행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8월말 합방 특사로 출옥하여 귀향하였다. 그 뒤 장준호는 각처를 전전하며 활동하던 중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였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루었다. 1923년 봄 장준호는 만주 각처를 거쳐 밀산(蜜山)으로 갔다. 1923년 4월 8일 밀산 한성동(韓成洞)에 도착한 장준호는 산남의진의 동지 규당 손진구와 칠곡 출신의 장성우를 만나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귀국한 장준호는 국내에서 신간회가 결성된 것을 보고, 같은 해 10월 밀산에서 신간회 지부를 결성하였다. 1928년 6월 신간회 본부가 있는 서울로 돌아와 신간회에 참여하여 만주 지역 순회강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병을 얻어 귀향하여 1930년 9월 19일 병사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장성우(張性愚)는 인동 출신이다. 1907년 9월에 산남의진의 총대장 정환직이 재기하자 손기찬(孫基瓚) 등 동지 수십 인과 참여하여 장영집사(將營執事)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해 가을 손기찬·장준호 등과 인동 및 칠곡 지역으로 파견되어 신병과 무기를 모집하였고, 나아가 인동 및 칠곡 지역에서 탄약 제조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산남의진이 해산한 뒤 호남 지방과 영남 지방을 잠행하다가 북만주의 밀산으로 망명하여 산남의진의 동지 손진구·장준호 등과 독립운동 기지 한성동을 개척하였다. 그 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귀국하여 병사하였다.

손기찬(孫基瓚)은 인동 출신으로 1907년 9월 산남의진의 총대장 정환직이 재기하자 장성우를 따라 동지 수십 인과 참여하였다. 손기찬은 1907년 가을 장성우·장준호 등과 인동 및 칠곡 지역으로 파견되어 신병과 무기를 모집하였고, 나아가 인동 및 칠곡 지역에서 탄약 제조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2.13 인명 한자 오류 수정 孫基燦 -> 孫基瓚
2012.11.07 내용 일부 삭제 <변경 전> 그러나 산남의진이 해산한 뒤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변경 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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