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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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영어의미역 | Present Ag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현재까지 경상북도 칠곡군의 역사.
[개설]
칠곡군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남서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은 대구광역시, 서쪽은 성주군과 김천시, 남쪽은 대구광역시, 북쪽은 구미시와 접하고 있다. 2014년 현재 3읍 5면 73법정리, 203행정리, 1,364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 구역의 변천]
칠곡군의 행정 구역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와 동일하게 왜관면·지천면·칠곡면·동명면·가산면·인동면·석적면·북삼면·약목면 등 9개면 99동이었다. 1949년 8월 13일 왜관면이 왜관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1읍 8면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 시·군·구·읍·면의 관할 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에 따라 북삼면 낙계동이 선산군 구미읍으로 편입되면서, 행정 구역이 축소되었다. 1974년 약목면 동부 출장소가 설치되어 옛 기산면 행정 구역을 관할하면서, 칠곡군의 행정 구역은 1읍 8면 1출장소가 되었다. 1978년 2월 15일에는 법률 제3014호 구미시 설치 및 부산시·경상남도 간 관할 구역 조정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인동면이 신설 구미시에 편입되었다. 이에 칠곡군은 1읍 7면 1출장소로 행정 구역이 축소되었다.
1980년 칠곡면이 칠곡읍으로 승격되어 칠곡군 행정 구역은 2읍 6면 1출장소가 되었다. 1981년 칠곡읍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어 칠곡군 행정 구역은 1읍 6면 1출장소가 되었다.
1983년 북삼면 오태동이 구미시에, 성주군 선남면 노석동이 약목면에, 석적면 아곡동이 왜관읍에, 석적면 황학동이 지천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약목면 동부 출장소가 기산면으로 승격되어 칠곡군의 행정 구역은 1읍 7면이 되었다. 1987년 선산군 장천면 석우동이 칠곡군 가산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칠곡군 조례 제1157호에 의거하여 동(洞)을 리(里)로 변경하였다.
1989년 가산면 신장리가 선산군 장천면에 편입되었다. 2003년 7월 1일 북삼면이 북삼읍으로 승격하여 2읍 6면이 되었다. 2006년 10월 1일 석적면이 석적읍으로 승격하여 3읍 5면이 되었다. 2014년 7월 말 현재 칠곡군은 3읍 5면, 73개 법정리, 203개 행정리, 1,364개 반을 관할하고 있다.
[정치·행정]
2014년 8월 현재 국회 의원[칠곡·성주·고령] 이완영, 경상북도 도의원 2선거구 2명 곽경호·김창규, 도 비례 대표 김정숙, 군의원 4선거구 10명, 군의회 의장 배완섭, 부의장 장세학, 의회 운영 위원회 위원장 이재호, 부위원장 정순재, 위원 김학희·이상천·장세학, 자치 행정 위원회 위원장 장재환, 부위원장 이택용, 위원 장세학·이상천·이재호, 산업 건설 위원회 위원장 조기석, 부위원장 한향숙, 위원 김학희·정순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2년 12월 현재 칠곡군의 행정 조직은 1실 15과 1의회 2직속 기관 3사업소와 3읍 5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무원 수는 총 703명으로 공무원 1인당 주민 수는 170여 명이며, 본청 351명, 직속 기관과 사업소 181명, 읍·면 156명, 의회 사무과 15명으로 편성되어 있고, 직능별로는 정무직 1명, 일반직 596명, 기능직 100명, 별정직 14명으로 편성되어 있다.
2014년 7월 민선 6기 백선기 군수가 취임하였고 ‘새로운 칠곡 100년’이라는 계획으로 일자리가 넘치는 칠곡·청년이 희망을 가지는 칠곡·어른신이 편한 칠곡·사회적 약자가 정당하게 대접받는 칠곡·군민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사는 칠곡 등의 군정 방침을 세우고 더 나은 자치 단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와 경제]
칠곡군의 인구는 1962년 10만 8745명에서 2014년 7월 말 현재 12만 5341명으로 연평균 2.0% 이상 증가하였다. 대도시를 제외한 많은 시·군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에 비해 칠곡군의 인구 증가율은 높게 나타나고 있다. 구미시와 대구광역시의 중간에 위치한 칠곡은 경부선, 경부 고속 도로·중앙 고속 도로, 국도 4호선·국도 33호선·국도 67호선·국도 5호선·국도 25호선, 국가 지원 지방도 67호선·국가 지원 지방도 79호선, 일반 지방도 906호선·일반 지방도 923호선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1990년대 이후 칠곡군에서 국가 산업 단지, 왜관 산업 단지, 기산 농공 단지 등을 조성하여 지속적으로 투자한 결과에 기인한다.
낙동강이 중앙을 지나고 있어 옛날부터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한 가구도 많이 있었으나, 산업 발전에 따라 낙동강이 오염되어 수산 자원은 고갈 상태에 있다. 고기잡이로 생업을 영위하던 가구는 없어졌으며, 몇 가구만이 부업 정도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저수지 등에 가두리 양식을 소규모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업 활동을 보면, 1770년에서 1830년대에 이르러 상업의 발달로 많은 장시들이 신설·폐지되었다. 또 각각 하나의 장시를 중심으로 상호 유기적인 시장권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1832년(순조 32)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의하면, 우암장(牛巖場)·매원장(梅院場)·상지장(上枝場)·남창장(南倉場)과 같은 시장이 본군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중 현대까지 남아 있는 시장은 왜관장·신동장·동명장·약목장으로 왜관읍의 왜관장이 1·6일, 지천면의 신동장이 5·10일, 동명면의 동명장이 4·9일, 약목면의 약목장이 3·8일에 각각 열리고 있다.
2012년 12월 말 현재 칠곡의 광업 및 제조업 사업체 수는 637개소, 월평균 종사자 수는 2만 25명이다. 구미 제3 국가 공단 입주 업체는 102개소, 종업원 수는 2,214명이며, 왜관 산업 1단지 입주 업체는 374개소, 종업원 수는 1만 240명, 기산 농공 단지 입주 업체는 21개소, 종업원 수는 525명이다. 이 세 곳의 단지가 칠곡군 산업의 중심지라 할 수 있으며, 주요 생산품은 전자, 섬유, 금속 등이다.
2012년 12월 말 현재 농업을 보면, 농가 호수는 5,486가구, 농가 인구는 1만 4353명, 경지 면적은 64.13㎢[논 31.72㎢, 밭 32.41㎢], 가구당 경지 면적은 1만 1690㎡, 미곡 생산량은 면적 25.82㎢에 1만 2534M/T이다.
특산물로는 벌꿀참외[왜관읍·북삼읍·약목면·기산면 일원], 금남오이[왜관읍 낙산리·금남리], 방울토마토[북삼읍], 사과, 배[기산면·북삼읍·석적읍 일원], 포도[지천면·왜관읍], 단감[북삼읍], 유학산 청정미나리, 표고버섯[가산면 송학리], 느타리버섯[가산면·동명면], 백합[기산면], 국화·튤립·분재[지천면], 금종쌀[기산면 영리], 학마을 맑은쌀[가산면 송학리 학마을], 다송쌀[약목면 교리], 초록솔잎쌀[북삼읍 인평리], 가산산성쌀[동명면 남원리], 석청쌀[석적읍 포남리], 아카시아쌀[지천면 창평리], 한백황토쌀[왜관읍 삼청리], 학나루쌀[왜관읍]이 있다. 가공 식품으로는 송광매원의 매실고추장과 같은 매실 제품, 경북 과학 대학교 감식초, 약목 참멸치젓, 딸기잼, 김치 등이 있다.
축산물로는 꿀, 계란, 한우 등이 있다. 2012년 12월 말 현재 한우 사육 농가는 533호에서 1만 4630마리, 돼지 사육 농가 38호에서 3만 3076마리, 닭 사육 농가 183호에서 161만 6894마리를 사육하고, 그 밖의 가축 사육 농가로 젖소 20호, 산양 88호, 사슴 13호, 개 489호, 꿀벌 236호에서 생산하고 있다.
칠곡군의 역점 사업은 첨단 도·농 복합형 종합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다. 우선 왜관읍·지천면·석적읍과 같은 중심 생활권은 첨단 산업과 물류 기능으로, 북삼읍·약목면·기산면과 같은 서부 생활권은 주거와 산업 기능으로, 동명면·가산면과 같은 동부 생활권은 주거, 휴양 기능으로 역점 개발할 예정이다.
[주요 사건]
광복 이후 칠곡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으로는 1946년 7월 3일에 일어난 왜관 식량 사건(倭館食糧事件), 1946년 10월에 일어난 10·1 폭동 사건, 1950년 6·25 전쟁 등이 있다.
1. 왜관 식량 사건
왜관 식량 사건은 미군정 하에서 식량 부족과 배분에 관련되어 발생한 것이다. 광복 후 1945년 인구 유입에 따른 소비량 증가로 인한 비축 양곡 부족, 악화된 기후에 따른 흉년, 1946년 여름 콜레라 발생 등 재해와 미군정의 무원칙한 식량 정책과 식량 강제 매입 등이 겹쳐지면서 매우 심각한 식량난이 발생하였다. 특히,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식량 부족과 이에 따른 기아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구에서는 1946년 7월 1일 식량 요구 소동이 일어나 대책을 강구했지만,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에 1946년 7월 3일 미군정 당국이 왜관에 있던 식량영단 창고에서 재고미(在庫米)를 대구로 싣고 가고자 하였다. 이를 안 왜관 주민들이 “왜관 주민에게 쌀을 배급하라!”면서 군용 트럭 3대를 향해 투석전을 벌였다. 밤이 되자 합세한 주민 1천여 명이 칠곡 경찰서 정문 앞에서 밤12시경까지 농성을 벌였다. 이 농성에서 주민 한 명이 미군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고, 주민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경찰청에서는 식량 농성에 대한 원인 규명보다는 체포한 사람 중에 인민 위원회 간부가 있다는 점을 들어 좌익의 선동으로 결론지었다.
2. 10·1 폭동 사건
10·1 폭동 사건은 1946년 10월 1일부터 3일에 걸쳐 대구 지역에서 일어난 10월 인민 항쟁이 영남·경기·호남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 속에 칠곡군에서도 10월 3일 새벽 칠곡 주민 200여 명이 삽·곡괭이·죽창을 들고 칠곡 경찰서와 약목 지서를 점령하면서 이틀간에 걸쳐 소요가 일어난 사건이다.
10월 20일 사건 대책 위원회가 조사한 칠곡군의 피해 상황을 보면, 사망자 15명[관리 8명, 일반인 7명], 부상자 16명[관리 7명, 일반인 9명], 건물 파괴 71곳[관청 65곳, 일반 6곳]이었다. 사상자의 경우에는 영천[사망자 64명, 부상자 49명], 대구[사망자 37명, 부상자 61] 다음으로 많으며, 건물 파괴의 경우는 대구[관청 32곳, 일반 124] 다음으로 많이 집계되었다.
3. 6·25 전쟁
칠곡군은 6·25 전쟁 때 낙동강~반변천~오십천을 연결하는 전선 최후의 방어선[워커 라인] 역할을 한 곳이자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의 왜관~다부동 지역이 돌파되면 대구~부산 간이 쉽게 제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2개 사단[국군 제1 사단, 미 제1 기병 사단], 북한 인민군은 4개 사단[1군단의 제3 사단, 2군단의 제1·13·15 사단]을 투입하여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다부동 전투(多富洞戰鬪), 328고지 전투, 유학산 전투[674고지 전투, 837고지 전투], 볼링장 전투, 가산산성 전투 등이 칠곡군에서 벌어졌다. 아군은 고투 끝에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칠곡군 일대에서 전투가 벌이지는 동안, 칠곡 주민들은 ‘전시 국민 생활 요강’에 따라 근검절약하고, 청·장년들은 왜관~다부 격전지의 보급 부대[일명 보국대(報國隊), 1개 대대 평균 50~60명]에 참가하였다. 학생들도 긴급 모병에 자원하고 여학생들은 의료·구호에 나섰다.
행정 기관은 전재민(戰災民) 식량 배급[1인 1일 3합 기준], 의료·주거 시설 보급, 피란민들에게 공공건물과 민가 알선, 임시 수용소와 급식소 설치, 고아 수용 등 일련의 구호 사업을 전개하였다. 6·25 전쟁에 참여한 무공 수훈자는 왜관읍 출신 36명, 북삼읍·지천면 각 3명, 가산면·석적읍·기산면·동명면 2명, 약목면 1명으로 총 51명이다.
칠곡군 일대의 전쟁이 끝난 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민간인들의 전적(戰績)을 담은 탑 2기, 비 6기, 기념관 두 곳이 설립되었다. 우선, 충혼탑(忠魂塔)은 1955년 10월 3일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에 건립되었다. 왜관 지구 전투 전승비(倭館地區戰鬪戰勝碑)는 1959년 3월 31일 육군 제1205 건설 공병단이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에 건립하였다.
충혼탑은 1972년 칠곡군 왜관읍 삼청 2리 산 15-10에 부지 9,521㎡에 높이 20m로 건립되었다. 다부동 전승비(多富洞戰勝碑)[유엔 전승비]는 1971년 12월 15일 제2 군사령부와 경상북도가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 125번지에 미 보병 제27연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倭館地區戰績記念館)은 1978년 7월 1일 교통부에서 칠곡군 석적면 중지리 산 33번지에 부지 4,749㎡에 건물 1동[462m²], 기념비 1기[3.95m], 동상[조국 수호 용사, 자유 수호인] 등을 세웠다. 총 사업비는 1억 2200만 원이 소요되었다. 전시실에는 로켓포 외 245점이 전시되었다.
다부동 전적 기념관(多富洞戰績記念館)은 1981년 11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하여 국방부에서 부지 2만 4310㎡에 건물 2동[287㎡], 기념비 1기[25m], 동상[4인군상(人軍像), 승리 여신상] 등을 세웠다. 전시실에는 무기 및 장비 262점이 전시되었다.
순국 경찰관 위로비(殉國警察官慰勞碑)는 1988년 10월 29일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에 건립되었다. 미군 포로 희생 추모비(美軍捕虜犧牲追慕碑)는 1990년 6월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미 캠프 캐롤(Camp Carroll) 부대 내에 건립되었다.
한편 6·25 전쟁 때 국군 제1 사단장이었던 백선엽(白善燁) 장군에 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로는 백선엽 장군 호국 구민비(白善燁將軍護國救民碑)와 백선엽 장군 전적비(白善燁將軍戰績碑)가 있다. 백선엽 장군 호국 구민비는 1951년 4월 칠곡군수 김옥현 외 4인이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414-5번지에 건립하였다. 백선엽 장군 전적비는 1973년 9월 13일 칠곡군 동명면 금암리 30-2번지 동명 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