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8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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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治 |
영어의미역 | Politic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집필자 | 이동형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가치의 권위적 배분 또는 국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총체적 행위.
[개설]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 사회에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하여 항상 희소 자원의 획득과 배분을 둘러싼 대립과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이나 투쟁을 조정하여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정치라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정치는 주로 국가나 정부라는 제도적인 권력 장치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정치를 정치인들이 공공의 목적을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획득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라 이해한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선거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정치권력을 부여받고, 이렇게 획득한 정당성을 바탕으로 입법부나 행정부에서 공공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변천]
일반적으로 지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의식은 선거에서 나타난 투표율과 지지율 등 선거 결과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 등 중앙 정치와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지방 선거는 관련 항목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실시되고 있는 선거의 종류를 보면,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 국민 투표, 그리고 지방 선거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는 국가 경영에 필요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기 때문에 지역민의 정치의식이 잘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 선거는 한국 헌정 사상 총 19회 실시되었으나,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된 것은 총 12회였다. 국회 의원 선거는 2012년 4월 11일까지 19회 실시되었다.
[제1 공화국]
제1 공화국에서는 3번의 대통령 선거와 4번의 국회 의원 선거가 직접 선거로 실시되었다. 대통령 선거의 경우, 1952년 8월 5일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처음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칠곡군의 투표율은 전국 평균 투표율인 88.1%보다 높은 93.4%를 기록하였다. 이승만(李承晩) 후보는 74.6%의 전국 득표율을 보이면서 당선했으며 칠곡군에서는 77.7%[2만 8281표]를 득표했다. 제3대 대통령 선거는 1956년 5월 15일 실시되어 유효 투표 총수의 70%를 획득한 이승만 후보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칠곡 군민들은 93.9%가 투표[전국 투표율 94.4%]에 참가해 조봉암(曺奉巖) 후보에게는 70.6%[2만 1183표]라는 높은 지지를 보낸 반면, 이승만 후보에게는 29.4%[8,821표]만의 지지를 보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趙炳玉)이 선거 운동 중 사망함으로써 이승만이 단독 선출되었는데, 당시 칠곡군의 투표율은 97.5%로 전국 투표율[97.0%]과 비슷했다. 칠곡 군민의 이승만에 대한 지지율은 85.0%[3만 7857표]로 전국 지지율[88.7%]보다 약간 낮았다. 이 선거는 대한민국 선거사상 최악의 부정 선거라 하여 이를 규탄하는 4·19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에 따라 국회는 내각 책임제로 개헌하고 해산했다.
국회 의원 선거는 모두 4차례 실시되었다. 1948년 5월 10일 한국에서는 처음 실시된 제헌 국회 의원 선거에 칠곡군에서는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국민당, 무소속 등으로 4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며, 총 유권자 5만 2122명 중 4만 1618명이 투표[투표율 79.8%]하여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장병만(張炳晩) 후보가 1만 779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 의원 선거는 제헌 국회에서 마련한 「국회 의원 선거법」[1950년 4월 10일 제정]에 의하여 임기 4년의 단원제 국회 의원 선거로 1950년 5월 30일 실시되었다. 칠곡군에서는 총 유권자 5만 402명 중 2만 9361명이 투표[투표율 58.2%]했으며, 11명의 후보자 중 장택상(張澤相) 후보[무소속]가 2만 1407표[72.9%]를 얻어 당선되었다.
장택상은 이후에도 제3·4·5대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장택상을 비롯해 김정식과 우인기 등 3명이 입후보하여 경쟁한 결과 78.1%의 투표율 속에 2만 7426표[71.8%]를 득표함으로써 당선되었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칠곡군의 총 유권자 5만 1034명 중 4만 334명[79.0%]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장택상 후보가 2만 5391표[62.9%]를 얻음으로써 3선 의원이 되었다.
장택상 의원은 제2대 국회에서는 조봉암·김동성(金東成)과 함께 공동 부의장에 선출됐었으며, 탄핵 재판소 의장에 선출되었고, 1950년에는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제3대 국회에서는 1956년 원내 국민 주권 옹호 투쟁 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제4대 국회에서는 1958년 반공 투쟁 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재일 교포 북송 반대 전국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제2 공화국]
4·19 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이후 출범한 제2 공화국에서는 1인 독재의 재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내각 책임제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제2 공화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는 간접 선거로, 민·참의원 선거는 직접 선거로 실시했다.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국회 의원[민의원] 및 초대 참의원 동시 선거 결과 전국에서는 민의원 233명과 참의원 58명이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칠곡군은 총 유권자 5만 6454명 중 4만 4016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78.0%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민의원 선거에는 모두 9명이 경선해 장택상 후보가 1만 2033표[27.3%]를 얻어 민의원이 되었다. 한편 초대 참의원 선거에서는 경상북도에서 38명이 후보자로 등록해 선거 활동을 벌였으며, 그 결과 칠곡군에서는 1부 의원 4명[백남억·이효상·송관수·권희송], 2부 의원 4명[이원만·권동철·감장섭·최달선]이 당선되었다.
[제3 공화국]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朴正熙)는 강력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한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 대통령 중심제로 환원하고, 직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 방식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제3 공화국에서는 모두 세 차례씩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5명의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민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의 윤보선(尹潽善) 후보 간 대결로 진행되었다. 전국 투표율 85.0%를 보인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유효 투표 총수의 46.6%를 얻어 당선되었는데, 칠곡군에서는 86.8%의 군민이 투표에 참가해 58.3%의 지지를 보냈다.
제6대 대통령 선거[1967년 5월 3일]는 6명의 후보자가 최종 경쟁한 가운데 또 다시 민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 간의 대결로 압축되었으며, 그 결과 박정희 후보가 유효 투표 총수의 51.5%를 얻어 당선되었다. 칠곡군에서는 5만 4644명의 선거인 중 4만 8674명[89.1%]이 투표함으로써 전국 평균[83.6%] 이상의 투표율을 보였다. 칠곡군에서 박정희 후보는 3만 2273표[유효 득표율 69.5%]를 얻은 반면, 윤보선 후보는 9,411표[유효 득표율 20.3%]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이 선거의 특징은 동(東)은 여(與), 서(西)는 야(野)라고 하는 표의 동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김대중(金大中) 후보 간의 각축전이었다. 이 선거의 전국 투표율은 79.8%였으며, 칠곡군은 82.8%였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는 전국에서 각각 53.2%와 45.3%를 획득해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칠곡군에서 박정희 후보가 3만 4489표[유효 득표율 77.2%]를, 김대중 후보가 9,702표[유효 득표율 21.7%]를 각각 득표했다.
국회 의원 선거의 경우, 5·16 쿠데타 후 개정 헌법[1962년 12월 26일]에 따라 1963년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지역구와 전국구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소선거구 다수 대표제와 비례 대표제를 병용하게 되었고, 후보자는 정당 추천제를 절대 조건으로 하여 무소속의 출마를 금지시켰다.
칠곡군은 성주군과 함께 경북 제16 지역구에 속해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총 11만 2813명의 선거인 중 8만 6667명이 투표에 참가해 76.8%의 투표율을 보였다. 제16 지역구에서는 모두 6명의 후보자가 경쟁했으며, 3만 1446표[37.5%]를 얻은 송한철(宋漢喆) 민주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송한철 의원은 78.7%의 투표율을 보인 제7대 국회 의원 선거[1968년 6월 8일]에도 입후보해 장택상을 비롯한 5명의 후보자와 경쟁한 결과, 3만 9186표[43.1%]를 획득해 2만 3389표[27.4%]를 얻은 자유당의 장택상 후보를 누르고 재선되었다.
송한철은 민주 공화당 경북 제16 지구당 위원장 및 경북도 지부 부위원장, 민주 공화당 산업 개발 분과 위원장, 공화당 국회 대책 위원[상공], 제2회 한일 청년 학생 교류 회의 한국 대표단장, 제4회 APU 총회 한국 대표 등을 역임했다.
제8대 국회 의원 선거[1971년 5월 25일]에서 경북 제19 지역구[칠곡군, 성주군]에서는 78.8%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5명의 후보가 출마해 57.8%를 득표[4만 8283표]한 김창환(金昌煥) 신민당 후보가 36.9%를 득표[3만 786표]한 송한철 민주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칠곡군에서는 김창환 후보가 2만 4174표[59.0%], 송한철 후보가 1만 4900표[36.4%]를 득표했다.
[제4 공화국]
1972년 국민 투표를 통해 유신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출범한 제4 공화국에서는 대통령을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 의한 간접 선거로 선출했으며, 국회 의원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간접 선거로 73명, 직접 선거로 지역구당 2명씩 146명을 선출했다. 이에 따라 통일 주체 국민 회의는 제8, 9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또한 1979년의 10·26 사건 이후에는 최규하(崔圭夏) 후보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이후에는 전두환(全斗煥)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73년 2월 27일의 제9대 국회 의원 선거는 1선거구[지역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어 실시되었는데, 칠곡군이 속한 경북 제8 선거구에서는 6명이 입후보했으며 82.4%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선거 결과, 민주 공화당의 신현확(申鉉碻) 후보와 신민당의 김창환(金昌煥) 후보가 각각 4만 5330표[28.5%]와 3만 8013표[23.9%]를 득표해 국회에 진출했다. 칠곡군의 투표율은 90.0%였으며, 신현확 후보는 2만 630표[40.6%]를, 김창환 후보는 1만 8472표[36.3%]를 득표해 타 지역보다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김창환은 재선 기간 동안 국회 내무 위원회 신민당 간사, 신민당 경북도 지부 지부장, 신민당 당무 위원, 신민당 경북 성주 칠곡 지구당 위원장, 신민당 경북 성주 칠곡 선산 군위 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했다.
제10대 국회 의원 선거[1978년 12월 12일]에서는 7명의 후보가 경쟁했으며, 선거 결과 민주 공화당의 신현확 후보[5만 6645표, 30.9%]와 무소속의 김현규(金鉉圭) 후보[4만 9001표, 26.8%]가 당선되었다. 칠곡군이 속한 경북 제7 선거구의 투표율은 83.4%였으며, 칠곡군은 78.6%의 투표율을 보이면서 신현확 후보가 1만 8966표를, 김현규 후보가 5,899표, 김창환 후보가 1만 2769표를 각각 득표해 김창환 후보에 대한 칠곡군의 지지는 계속되었다.
신현확은 1975년 보건 사회부 장관, 1978년 부총리 겸 경제 기획원 장관이 되었고, 1979년 10·26 사건을 맞아 국무총리직을 수행하였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한 국무 회의를 주재하고 그 다음날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법 개정 심의 위원장을 맡아 제5 공화국 헌법을 주도하기도 했다.
[제5 공화국]
제5 공화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의한 직접 선거를 합쳐 모두 두 번의 대통령 선거와 중선거구제에 의한 두 번의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1981년 2월 11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결과 선출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동년 2월 25일 실시되었다. 4명의 후보가 나선 이 선거에서는 90.23%를 얻은 민정당의 전두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16년 만에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 정의당의 노태우(盧泰愚) 후보와 통일 민주당의 김영삼(金泳三) 후보, 평화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 신민주 공화당의 김종필(金鍾泌) 후보 간의 4강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 선거에서 칠곡군은 전국 평균[89.2%]보다 약간 높은 92.5%의 투표율을 기록하였으며, 36.6%로 당선된 노태우 후보는 칠곡군에서는 3만 6338표[77.5%]를 획득했으며, 김영삼 후보는 8,335표[17.8%], 김대중 후보는 1,087표[2.3%], 김종필 후보는 861표[1.8%]를 각각 득표하였다.
제11대 국회 의원 선거는 1981년 3월 25일 실시되었는데, 개정된 「국회 의원 선거법」에 따라 지역구에서 2명씩의 의원을 뽑았다. 1981년 3월 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4명이 입후보했으며, 민주 정의당의 박재홍 후보[8만 6204표, 52.6%]와 민주 한국당의 김현규 후보[4만 4722표, 27.3%]가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칠곡군이 속한 경북 제8 선거구의 투표율은 86.9%였던 반면, 칠곡군의 투표율은 조금 낮은 78.4%였으며, 칠곡군에서의 득표는 박재홍 후보[1만 9787표], 장동식 후보[1만 9587표], 김현규 후보[1만 596표]의 순이었다.
1985년 2월 12일의 제1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2:1의 경쟁률 속에 민주 정의당의 박재홍 후보와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현규 후보가 각각 7만 9679표[47.0%]와 5만 9813표[35.3%]를 얻어 당선되었다. 칠곡군에서는 83.3%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박재홍 후보가 1만 7034표를, 김현규 후보가 1만 4245표를 득표해 지난 선거 대비 김현규 후보에 대한 칠곡군의 지지율은 상승했다. 박재홍은 민주 정의당 재해 대책 위원장, 원내 부총무, 민주 자유당 당무 위원 등을 맡았으며, 김현규는 국회 예산 결산 위원회 간사, 신민당 원내 부총무, 민한당 정책 심의회 의장, 신민당 원내 총무 등을 역임했다.
[제6 공화국]
6·29 선언과 여야 합의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의해 출범한 제6 공화국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에서 출범했으나 1990년 2월 8일 민주 정의당과 신한 민주당, 신민주 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신한국당이 창당됨으로써 야당인 평화 민주당과의 양당 체제가 구축되었다.
국회 의원 선거의 경우 제13대 국회 의원 선거는 1선거구에서 1인의 의원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1988년 4월 26일 실시되었는데, 칠곡군은 성주군과 함께 또다시 하나의 선거구가 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9만 4305명의 유권자 중 84.7%가 투표를 하였는데, 그 결과 장영철(張永喆) 민주 정의당 후보가 56.8%[4만 4539표]로 통일 민주당의 김창환 후보[3만 3868표, 43.2%]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칠곡군에서는 85.0%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장영철 후보가 3만 272표[69.8%], 김창환 후보는 1만 3081표[30.2%]를 얻었다. 민주 자유당 후보로 나선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장영철 후보는 5만 5124표[72.0%]를 획득함으로써 2만 1468표[28.0%]만을 득표한 민주당의 도호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을 청산하는 출발점이었다. 과거 군사 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의 장기 집권, 민주화 투쟁, 극한 대결, 흑백 논리 등 한국 정치의 한계와 질곡은 문민 후보들 간의 대결로 치러진 14대 대선으로 극복될 가능성이 열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92년 12월 28일 실시된 이 선거에서는 모두 7명이 입후보했으며, 81.9%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민주 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42.0%를 얻어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81.9%의 투표율을 기록한 칠곡군에서 김영삼 후보는 2만 8870표[63.8%]를 획득했으며, 김대중 후보는 4,096표[9.1%], 정주영(鄭周永) 후보는 6,920표[15.3%]를 각각 득표했다.
[문민정부]
문민정부(文民政府)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가 각 한 차례씩 실시되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실시된 제15대 국회 의원 선거[1996년 4월 11일]는 63.9%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군위·칠곡군 선거구에서 장영철·이인기·김현규 등 7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장영철 신한국당 후보가 1만 9393표[31.1%]를 획득해 당선됨으로써 3선 의원이 되었다. 칠곡 군민들은 전국 투표율보다 약간 높은 71.5%가 투표에 참가했으며, 장영철 후보에게 33.0%[1만 4290표]의 지지를 보냈다. 칠곡군에서 김현규 후보는 6,745표를, 이인기 후보는 8,791표를 득표했다. 장영철은 3선 의원을 지내면서 보사부 장관, 관세청 청장, 노동부 장관, 국회 예산 결산 특별 위원회 위원장, 국민회의 정책위 의장, 새천년 민주당 경북 칠곡 지구당 지구당 위원장, 당무 위원 등을 역임했다.
국제 통화 기금[IMF] 관리 체제라는 초유의 경제 위기 속에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80.7%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40.3%의 지지를 얻어 38.7%를 득표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칠곡군에서는 전국 투표율 보다 약간 낮은 80.1%의 투표율을 보였는데, 이회창 후보에게는 62.5%, 이인제(李仁濟) 후보에게는 19.6%, 김대중 후보에게는 14.9%의 지지를 보냈다.
[국민의 정부]
국민의 정부 하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가 각 한 번씩 실시되었다.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2000년 4월 13일]는 57.2%라는 투표율을 보여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거에서 칠곡군의 투표율은 68.9%로 전국 투표율보다 10%가량 상회했으며, 한나라당 이인기(李仁基) 후보가 2만 3898표[53.4%]를 득표하면서 민국당의 이수성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참여 정부의 대통령을 뽑은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2002년 12월 19일 실시되었다. 이회창[한나라당], 노무현(盧武鉉)[민주당] 등 7명의 후보가 경쟁한 이 선거의 전국 투표율은 70.8%를 기록한 반면, 칠곡군의 투표율 약간 낮은 70.0%였다. 선거에서는 48.9%를 득표한 노무현 후보가 46.6%를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는데, 칠곡군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3만 7026표[71.2%]를 득표했으나, 노무현 후보는 1만 2210표[23.5%]를 얻는 데 그쳤다.
[참여 정부]
노무현 정부 하에서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와 제17대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회 의원 선거는 2004년 4월 15일 실시되었으며, 60.6%의 투표율을 보였다. 이 선거에서 칠곡군은 고령군, 성주군과 함께 하나의 선거구가 되었으며, 한나라당의 이인기 후보와 우리당의 조창래 후보가 경쟁한 가운데 이인기 후보가 60.1%[4만 9586표]를 득표함으로써 제17대 국회 의원에 재선되었다. 당시 칠곡군에서는 이인기 후보가 2만 6874표[64.1%]를, 조창래 후보는 1만 5046표를 득표했으며, 투표율은 55.8%로 전국 투표율보다 낮았다.
한나라당이 오랜 야당 생활을 접고 정권을 창출한 제17대 대통령 선거는 2007년 12월 19일 실시되었다. 한나라당의 이명박(李明博) 후보와 대통합 민주 신당의 정동영(鄭東泳) 후보 등 12명의 후보가 난립해 치룬 선거의 전국 투표율은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최저인 63%였으며,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1149만 2389표를 얻어 득표율 48.7%로 당선되었다. 칠곡군에서는 61.9%의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이명박 후보가 67.3%[3만 5502표]를 득표했으며, 이회창 후보는 17.3%[9,120표], 정동영 후보는 7.9%[4,147표]를 얻었다.
[이명박 정부]
이명박 정부에서는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제18대, 제19대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2008년 4월 9일 실시된 제18대 국회 의원 선거의 전국 투표율은 46.1%였으며, 칠곡군의 경우에도 47.3%를 기록해 역대 국회 의원 선거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칠곡군이 포함된 고령군·성주군·칠곡군 선거구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선 이인기 후보가 3만 9375표[49.4%]를 득표해 한나라당의 석호익 후보[3만 7515표, 47.0%]를 누르고 3선 의원이 되었다. 칠곡군에서는 이인기 후보가 53.1%, 석호익 후보는 44.1%를 득표했다.
이인기 의원은 제18대 국회에서 ‘경상북도 칠곡시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안’, ‘주민 소환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 ‘국가 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 등 30여 건 이상의 입법 활동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간사, 장애인 특별 위원회 위원, 정치 개혁 특별 위원회 위원, 산업 자원 위원회 위원, 농림 해양 수산 위원회 위원, 행정 자치 위원회 간사, 행정 자치 위원회 예산 결산 심사 소위원장, 한나라당 경북 고령·성주·칠곡 당원 협의회 운영 위원장 등 왕성한 국회 활동을 하였다.
제19대 국회 의원 선거는 2012년 4월 11일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의 전국 투표율은 54.2%로 제18대 국회 의원 선거보다 높았으며, 칠곡군은 전국 투표율보다 낮은 48.7%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고령군·성주군·칠곡군 선거구에서는 이완영 후보[새누리당]와 최국태 후보[민주 통합당], 황옥성 후보[기독당], 석호익 후보[무소속], 송우근 후보[무소속] 등 5명의 국회 의원 후보가 경쟁해 4만 2569표[50.49%]를 획득한 이완영 후보가 제19대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완영 후보는 칠곡군에서 2만 1537표[48.55%]를 득표한 반면, 석호익 후보는 1만 4376표[32.40%]를 획득하였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는 2012년 12월 19일에 실시되었으며, 새누리당 박근혜(朴槿惠) 후보와 민주 통합당 문재인(文在寅) 후보를 비롯해 모두 7명이 입후보[통합 진보당 이정희 후보 사퇴]하여 6명의 후보가 경쟁하였다. 투표율은 75.8%로 제17대 대통령 선거[63.0%] 대비 12.8% 상승했으며, 같은 해 실시된 제19대 국회 의원 선거[54.2%]와 비교해서도 21.6% 증가해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높았다.
선거 결과 박근혜 후보가 1577만 3128표[51.55%]를 얻어 1469만 2632표[48.02%]를 득표한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칠곡군의 투표율은 76.7%로 전국 투표율보다 높았으며, 칠곡 군민들은 박근혜 후보에게 80.6%[5만 7485표]의 높은 지지를 보냈다.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은 19.1%[1만 3560표]였으며, 나머지 후보들은 1% 이하의 득표율을 보였다.
[박근혜 정부]
박근혜 정부에서는 2016년 제20대 국회 의원 선거와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다.
[평가]
우리나라 양대 선거의 결과 나타난 칠곡 군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투표율을 통해 보면 우리나라 전체 투표율과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어 중간 수준이다. 이러한 현상은 칠곡군이 구미시와 대구광역시 인근에 위치해 있고, 교통 환경이 양호한 편이며, 산업 기반이 조성되어 있어 외지인의 유입이 다른 군 단위 농촌보다는 자유롭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칠곡 군민들의 정치적 성향을 보면, 보수 정당 또는 보수 정당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 출신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 보수적이며 지역주의 성향도 강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