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E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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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1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하 |
각산1리는 북쪽으로 비룡산과 서진산을 사이에 두고 약목면과 경계를 짓고 남쪽으로는 지경령(地境嶺)을 사이에 두고 성주군 월항면과 경계를 이룬다.
이 때문에 각산1리는 예부터 통혼권에서부터 시장 등 일부 생활문화권이 칠곡군 약목면 및 성주군 월항면과 같았다. 이런 이유로 이 두 지역을 통해 옛 각산1리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각산1리 지역은 원래 인동군 기산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찰전, 내각, 외각, 서치, 봉산 등의 일부를 병합하고 내각과 봉산의 이름을 따서 각산이라 칭하고 칠곡군 약목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86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11874호로 약목면 동부출장소가 기산면으로 승격되면서 각산1리는 기산면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기산면에 편입된 후에도 각산1리 사람들은 약목면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약목면의 약목장으로 가는 길 중에 비룡고개를 넘어가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시간은 단축할 수 있었지만 길이 험해서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가, 각산1리 부녀자들 중 80% 이상이 성주에서 시집을 왔다는 것이다. “여기 80%가 성주에서…… 동네에서 친정 물으면 전부 성주라. 그래. 옛날에는 전화도 없지요. 시장에 가면, ‘어디 중신할 때 없나’ 하면 ‘우리 동네에 어떤 처녀 있다’ 하고 그래서 연락하고…….”
전화도 없던 시절, 성주장에서 일어난 중신으로 각산1리 부녀자들 중 대부분이 성주에서 시집을 왔단다. 같은 날 두 사람이 이 각산1리로 시집을 온 적도 있다고. 그 날이 결혼하기 좋은 기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같은 날 결혼을 했던 할머니들 말씀이, “길을 뺏기면 잘 살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어서 길을 뺏기지 않으려고 출발하기 전날 밤부터 길에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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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환 옹 혼례 모습-신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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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환 옹 혼례 모습-신랑과 신부 모습
잦은 성주와의 왕래로 빚어진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 보면 유래에 ‘성주 장골이 칠곡 장골 하나 못 당한다’라고 했어. 왜 그러냐면 성주 월항 넘어가면 양반이 또 많이 살잖아. 그래 여기 와보니까 돌이 많이 있거든. ‘빗돌을 하나 해 줄 수 없냐’ 하니까 칠곡 양반이 ‘해줄 수 있지’ 여기 앞에 바로 보이는 (질매재)고개가 저게 큰 길이었습니다. 그래 그 돌을 성주 장골이 매고 갔대요. 매고 갔는데 쩔쩔매니까, 힘에 부딪치니까 (장씨들이) 안타까워서 밑에 하인들한테 ‘저거 좀 갖다 줘라’ 해서 이 사람들이 져서(짊어지고) 갖다 줬다 했어…… 그래 지금도 등개 카는 그 뒤에 마을 가면 비가 많아.”
유난히 돌이 많았던 각산1리에서 돌을 짊어지고 가던 성주의 장골(壯骨)들이 힘에 부쳐 운반에 어려움을 겪자 인동장씨 하인들이 대신 짊어지고 갖다 주었다는 일화이다.
각산1리의 유명한 인물인 사미헌 장복추 선생은 봉우재를 넘어 감응사로 공부를 하러 다녔다고 한다. 당시 감응사에는 성주와 칠곡을 비롯한 여러 지방 선비들이 공부를 하러 다녔는데, 장복추 선생은 성주 사는 선비와 친하게 지내서 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봉우재에서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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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사 역문
“‘아이고 이(봉우재)까지 왔는(온)김에 우리 집(각산1리)에서 하루 자고 가세’, ‘아이 그럴까? 그냥 갈까?’ ‘아이고 어예(어떻게) 그랄(럴)수 있느냐? 하룻밤만 자고 가요’ 어차피 하루 주무신단 말이에요. ‘아이고 그럼 갈란가? 그럼 바래다 줄게’ 결국 바래다 주셨어요. (봉우재)고개까지 오신 거에요. 그럼 갈라카면(가려고 하면) ‘아이고 이 사람아 이까지 왔는데 우리 집(성주집)에 안 가고 되겠나? 우리 집(성주집)에 가세~’ 하고 또 가시는 거에요. 그래가 또 주무시는 거에요. 그러면 또 하루나 이틀 계시다가 또 내 갈게, 하면 아이고 그래 내가 또 바래다 주지. 또 오시는 거에요~”
그렇게 장복추 선생과 친구는 이별이 아쉬워 짧게는 하루나 이틀, 길게는 열흘에서 보름까지 서로의 집에서 묵으며 왔다갔다했는데, 결국 장복추 선생 집안에서 제사가 있기 열흘 전에야 비로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