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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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敎 |
영어공식명칭 | Religion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신앙 행위의 총칭.
[개설]
인간은 출생·죽음·우연·미래와 같은 한계 상황에 직면하면 초월적 존재나 원리를 통하여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과하며, 더 나아가 그 힘을 빌려 그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초기에는 세계내(世界內) 존재에 정령을 부과하는 토테미즘(Totemism)이나 애니미즘(Animism)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후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보다 초월적 존재나 원리에로 귀의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것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종교라고 부르는 불교·유교·기독교·이슬람교와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화를 보면, 부족 국가 시대에는 곰이나 호랑이 등에 정령을 부과한 토템 신앙이었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불교와 유교가 이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와 개신교가 널리 보급되고, 우리 내부에서도 동학과 대종교 같은 민족 종교들이 일어났다. 달성에서의 종교적 흐름도 큰 틀에서 보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달성군의 불교]
달성군에 불교가 전파된 자취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포산 이성(包山二聖)」의 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혜공왕 때의 인물로 추정되는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라는 두 성사(聖師)는 포산(包山)에서 함께 수도하여 각각 성불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포산이란 바로 달성군의 동쪽에 있는 비슬산(琵瑟山)이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경상도 현풍현 불우(佛宇) 부분을 보면 신라헌덕왕 때 창건된 대견사(大見寺)가 비슬산 남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문선(東文選)』에는 고려의 승려로 천태종 백련 결사의 제2세인 천인(天因)이 비슬산에서 수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은 승려 생활의 전반 정도를 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 무주암(無住庵), 묘문암(妙門庵), 안흥사(安興寺) 등에 머물면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조선태종 때는 대견사의 관음이, 세종 때는 대견사의 석장 장육 관음이 땀을 흘렸다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달성에는 불교가 적어도 신라 중대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존하는 사찰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먼저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최정산(最頂山)에 있는 남지장사(南地藏寺)는 조선 사찰 자료에 따르면 육조 혜능의 법손으로 중국조동종(曹洞宗)의 개창자인 양개(良价)[807~869]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달성군 가창면 오리에는 운흥사(雲興寺)가 있는데, 원래 신라흥덕왕 때 승려 운수가 창건한 동림사(棟林寺)였다는 구전이 있다. 달성군 옥포읍 반송리에 있는 용연사(龍淵寺)는 두 개의 사적기가 있는데, 그 하나는 912년(신덕왕 1)에 창건되었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신라 말의 보양 선사(寶壤禪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달성군 유가읍 양리에 있는 유가사(瑜伽寺)는 관기와 도성 두 성사가 수도한 무대로 그 창건이 신라혜공왕 대와 흥덕왕 대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리고 유가사의 부속 암자인 도성암(道成庵)은 선산도리사(桃李寺), 팔공산(八公山) 성전암(聖殿庵)과 함께 영남의 3대 수행 도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달성군 유가읍 용리의 소재사(消災寺)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신라 시대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의 용문사(龍門寺)와 천내리의 화장사(華藏寺) 등이 꾸준히 창건되어 온 것을 보면 불교가 달성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유지해 온 종교라 할 수 있다.
[달성군의 유교]
달성에서 유교의 자취는 충렬왕 때 사람인 추적(秋適)에서 맨 먼저 찾을 수 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편찬자로 알려진 추적이 달성 지역을 연고로 활동하였다고 하니, 당시 유교의 수준이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유교가 달성에 보다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길재(吉再)의 낙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길재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여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로 인해 영남의 사림이라고 하는 학자들, 즉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해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을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 김굉필은 달성이 배출한 학자로 1610년에는 동방오현 중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달성의 유교는 상당한 수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그것은 이 지역에 김종직을 배향하는 달성 도동 서원(達城道東書院)을 비롯해 10개에 달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원들에 배향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달성이 배출한 학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연 서원(禮淵書院)의 곽준(郭逡)과 곽재우(郭再祐)이다. 곽준은 낙동 칠현(七賢)인 배신(裵紳)과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다. 곽재우는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도학, 병서, 천문 등에 통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홍의 장군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이강 서원(伊江書院)의 서사원(徐思遠)은 정구의 문인으로 주자학과 퇴계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였다. 용호 서원(龍湖書院)의 도성유(都聖兪)는 정구와 서사원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문장과 행실이 출중하였으며, 칠곡 문고를 만드는 데 세전지를 흔쾌히 희사하여 오늘날 칠곡 향교를 이루도록 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양 서원(尼陽書院)의 곽인방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김종직이 그를 김굉필과 함께 수재라고 칭찬할 만큼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달성에서의 유교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여 우리의 전통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 가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조선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되는 현풍 향교가 있다. 여기에서는 아직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유교를 보급하기 위해 유도회(儒道會)와 달성 유림 교육원(達城儒林敎育院)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달성군의 기독교]
1. 천주교
천주교 박해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한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따르면 신유박해 당시, 경기도 사람 조운형이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으로 귀향을 왔다고 한다. 이것이 기록상으로는 천주교가 달성에 들어왔다는 최초의 것이다. 그리고 1830년에서 1835년 사이에 달성군 하빈면 낙골에 살던 이재건과 그 가족들이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에서 신앙 생활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달성에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계기를 만들지는 못했다. 달성에서의 천주교는 대구와 부근 지역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그 영향으로 유입되었다. 그 시작은 김보록 신부가 1882년 강원도 원주의 부흥골에 있으면서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것이었다. 이후 1885년 김보록 신부가 칠곡 신나무골에 안착하면서 본격적으로 대구에서 전도 활동을 하고, 그것이 1898년 12월 한옥의 계산 성당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 여파가 달성에도 미쳐 공소와 성당들이 생겨났다.
달성 최초의 공소는 1906년 월배면 상동에서 개소한 조암 공소이다. 신도가 늘어나자 1913년과 1920년에 조암 공소에서 분리하여 서산 공소와 천내 공소가 개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5월, 모 본당이 남산 본당에서 분가하여 화원 성당이 건립되었다. 달성의 천주교는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면서 군내 곳곳에 개소한 공소들을 성당으로 건립하였다. 1969년 2월 현풍 성당, 1988년 10월 논공 성당, 1998년 가창 성당, 2002년 1월 서재 성당, 2002년 6월 성산 성당, 2005년 8월 다사 성당, 2007년 9월 유천 성당이 그것이다. 달성에서 천주교의 교세가 이렇게 확장된 것은 대구 인근의 지역으로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신자들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2. 개신교
달성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그것도 직접적인 전래가 아닌 간접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1897년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대구에 처음 교회가 설립된 후, 대구뿐만 아니라 인근의 칠곡이나 경산과 같이 달성 사람들이 그 교회를 다니면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달성의 교회는 당시 전도와 교회 설립 활동을 활발히 하였던 부해리(傅海利), 맹의와(孟義窩), 안의와(安義窩) 등의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때는 아직 한국 장로 교회의 치리 기관(治理機關)인 독립 노회(獨立老會)가 결성되기 이전이었지만, 달성에는 이미 4개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설립된 교회가 현풍 하동 교회[1905년], 무등 교회[1907년], 신당 교회[1909년], 설화 교회[1910년] 등이다.
이후 일제 치하에서도 달성에서 개신교의 교세는 꾸준히 성장하였다. 그래서 달성의 각 지역에 차례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24년에는 달성군 화원면에 화원 교회가, 1930년에는 현풍면[현 현풍읍]에 차천 교회가, 1937년에는 구지면에 구지 장로 교회가 각각 설립되었다. 그리고 8·15 광복 후에는 교회의 설립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1947년 달성군 구지면에 목단 교회의 설립을 필두로, 1948년 논공읍에 논공 교회, 1951년 다사면에 다사 교회, 1952년 가창면에 가창 교회, 1953년에 하빈면에 하빈 교회가 각각 건립되었다. 그래서 지금에는 달성의 10개 읍면에 100개가 넘는 교회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교회의 설립에도 달성군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이나 교세가 약화되고 있다. 이는 개신교 내부의 갈등과 대립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성군의 신종교]
달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종교로는 찰스 테이즈 러셀의 국제 성서 연구자 협회가 그 기원인 여호와의 증인, 문선명에 의해 창시된 기독교 계통의 통일교, 미티구치에 의해 창시된 불교 계통의 한국 SGI[국제 창가 학회] 등이 있다. 이들은 1970년대 전후로 달성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크게 교세를 떨치지 못하고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