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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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南 義陳[玄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봉숙 |
[정의]
1906년 영천에서 조직되어 대구·현풍 등 영남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 부대.
[설립 목적]
산남 의진(山南義陣)[현풍]은 중추원 의관(議官) 정환직(鄭煥直)[1844~1907]이 의병을 일으켜 국권 회복을 도모하라는 고종의 밀명을 직접 받고 일으킨 의병 부대이다. 을사조약 이후 고종은 비밀리에 측근들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당부하는 밀조를 내렸다. 이강년(李康秊)·고광순(高光洵)·노응규(盧應奎)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 무렵 정환직도 고종으로부터 중국의 고사인 ‘화천지수(華泉之水)’라는 밀지를 받고 그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변천]
고종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盧應奎)와 상의하여 자신은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병을 후원하고 정용기가 고향 경상북도 영천으로 내려가 거사를 도모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영남 지방에서 의병의 세력을 크게 떨친 뒤 서울을 향해 진공하는 것으로 활동 방향을 구상하였다.
정용기 등의 주도하에 영천 창의소가 설치되고 의병을 모집하여 1906년 3월 산남 의진이 편성되었다. 산남 의진은 대장 정용기를 중심으로 중군장 이한구(李韓久), 참모장 손영각(孫永珏), 소모장 정순기(鄭純基), 도총장 이종곤(李鍾崑),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군장 서종락(徐鍾洛), 좌영장 이경구(李景久), 우영장 김태언(金泰彦), 연습장 이규필(李圭弼), 도포장 백남신(白南信) 등이 포진되었다. 지방 연락 책임자와 각 지역 담당 활동 책임자 인원이 24개 지역에 총 79명에 달했을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다. 대구·현풍 지역의 활동 책임자 수는 세 명이었다.
산남 의진은 결성 직후 영해 지방의 신돌석(申乭石) 의병 부대를 후원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경주 우각(牛角)[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우각리]에서 경주 진위 대장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간계로 정용기가 체포되었다. 산남 의진은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의병장이 체포되어 전열이 무너졌다. 이후 중군장 이한구가 지휘하였으나 1906년 7월 하순 일시 활동을 중지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1906년 9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대구 경무청에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조직을 정비하였다. 대한 제국 군인 출신인 우재룡(禹在龍)과 김성일(金聖一) 등이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의 군사 훈련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산남 의진의 전력이 상당히 보강되었다.
1907년 8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였지만 일제 군경의 압박과 신돌석 의병과의 연합 부진, 무기와 같은 군비 부족 등의 사정으로 큰 곤란을 겪었다. 1907년 9월 초 영일군 죽장[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와 산남 의진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전사 순국하는 피해를 입고 의병진은 괴멸하였다. 그 후 정환직이 의병진을 이끌었으나 일본군의 추격과 군수 물자와 탄약의 부족으로 해산하였다. 정환직은 1907년 12월 청하[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서 체포되어 경상북도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산남 의진은 규모·활동 지역·활동 기간 등에서 영남 지방의 의병을 대표하는 의진 가운데 하나였다.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해 북상을 준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전국 의병의 연합체로 결성된 십삼도 창의군의 선도가 되었다. 산남 의진의 잔여 의병들은 항일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대한 광복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세력으로 부상하는 등 영남 지방의 독립운동 확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