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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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達城郡- 水利組合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달성군에서 수리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된 조합.
[개설]
수리조합(水利組合)은 1906년에 제정된 수리조합 조례에 따라 관개 배수 시설의 신설 및 보수와 관리를 목적으로 설치된 조합이다. 수리조합의 설치는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한 일제가 그 원활한 성공을 위해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었고, 달성군에서는 수성 수리조합(壽城水利組合)·동부 수리조합(東部水利組合)·해안 수리조합(解顔水利組合) 등이 운영되었다.
[배경]
일제가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 수리조합의 설치를 통한 토지 개량 사업이었다. 수리조합을 설치하여 농경지에 관개, 배수함으로써 토지 생산성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에 따라 일제는 조선 총독부와 조선 토지 개량 주식회사·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을 통해 수리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달성의 수리조합]
달성군의 수리조합은 수성 수리조합·동부 수리조합·해안 수리조합 등이 설치·운영되었다. 먼저, 수성 수리조합은 1924년 5월 26일에 설립되었다. 수성 수리조합은 같은 해 9월 27일 기공식을 가졌으며, 1927년 4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수성 수리조합은 달성군 수성면 여덟 개 동과 가창면 한 개 동 소재의 3.67여 ㎢의 논에 관개 배수를 하고 있다. 수성 수리 조합을 최초로 발기한 한 사람은 대구의 부호 서화춘(徐和春)·정재학(鄭在學)·강석회(姜錫會) 등 대지주와 현 부조합장 일본인 수기림태랑(水崎林太郞) 등이었다. 조합장은 수성면의 부호인 진희규(秦喜葵)였다. 수성 수리조합의 조합원은 전체 43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조선인 414명, 일본인 21명, 프랑스인 1명으로 구성되었다. 수성 수리조합의 총면적은 3.67㎢인데, 국적별로 보면 조선인 소유 3.11㎢, 일본인 소유 0.40㎢, 프랑스인[천주교] 소유가 0.16㎢였다.
수성 수리조합의 설계 특징을 보면, 달성군 가창면에서 발원하여 수성면을 관류하는 신천(新川) 중류에 길이 83간[150.91m], 깊이 12척[3.63m]이다. 밑바닥은 돌로 바닥을 깔았고, 일부의 지하수를 함께 수리조합의 수로로 끌어와 약 0.20㎢나 되는 크기의 저수지에 2300만 입방척[64만 90㎥]의 관개수를 저장하였다. 필요에 따라 수리조합의 구역 전체에 배수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 이 저수지는 원래 논이었던 농지를 저수지로 만든 것이었다. 이 저수지 조성 사업에 들어간 예산은 총 16만 7000원 정도였다. 이 자금은 동양 척식 회사에서 15개년 연부로 6만 2500원을 차입하여 매년 7,700원씩을 보상하기로 하고 마련한 것이었다. 또 관에서 보조를 받아 충당했는데, 그 내역을 보면 총독부에 1만 1000원, 도청 지방비에서 2만 원, 대구부청에서 4만 원 등 합계 9만 1000원이었다.
다음으로 동부 수리조합을 보면, 1926년 11월 20일 달성군 수성면 범물동에 위치한 학산재(學山齊)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범물동의 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11월 9일 저수지 설계 계획을 제출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동부 수리 조합의 관개 혜택을 보게 될 면적은 약 1.79㎢로 크지 않은 규모였다. 수리조합원의 규모는 328명의 지주에 소작인 450명 등 전체 800명 정도였다. 동부 수리조합의 창립 위원은 이재우(李載雨)·서병화(徐炳和)·진이홍(秦貳洪)·양상순(楊相淳)·최경영(崔敬榮)·정석원(鄭錫源)·양재휘(楊在輝)·김경준(金敬俊)·이상헌(李相憲) 등 모두 11명이었다.
그 다음으로 해안 수리조합은 1920년대 중후반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검사동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해안 수리조합은 공사 시작 단계에서 면민 300명의 반대의 벽에 부딪쳤다. 그 뒤 1931년 2월 중순 조합장 서병주(徐炳柱)를 중심으로 창립된 것으로 보인다. 해안 수리조합의 관개 혜택 면적은 약 4.96㎢였다.
[의의]
달성군에는 1920년대 세 개의 수리조합이 창립되었으나 운영에는 수준 차가 뚜렷하였다. 특히, 세 개 중 두 개가 존폐 위기에 놓인 만큼 일제의 수리조합을 통한 미곡 증산이라는 거대한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대구부(大邱府)를 포위하고 있는 농촌 지대인 달성군의 농업 생산에 있어 일제가 계획한 만큼의 식량 증산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