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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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憂園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즈음인 1940년에 대구 사범 학교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 결사.
[설립 목적]
무우원(無憂園)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의 낙원을 건설하고, 폭력적인 투쟁이 아닌 문화·경제적인 힘을 길러 독립을 달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무우원이라는 이름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근심 걱정 없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뜻이자, 유태인처럼 경제의 힘을 길러 적을 물리쳐 잠 자는 민족혼을 일깨우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변천]
1940년 6월에 대구 사범 학교 특설 강습과에 입학한 조형길(趙亨吉)·김병욱(金炳旭)·현영만(玄泳晩) 등은 항일 비밀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대구 사범 학교 재학생 이형수(李亨洙)·배환규(裵煥圭)·박찬억(朴讚億)·유성준(兪性濬) 등을 포섭하여, 1940년 12월 1일 비밀 결사 무우원[약칭 M]을 조직하고, 총칙과 세칙을 만들었다. 무우원은 당면 투쟁 목표로 내선일체(內鮮一體)나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는 허구성을 폭로하고, 지원병·공출(供出)·징용(徵用) 거부 등을 내세웠다. 목표 실행을 위하여 구성원들은 불교를 믿고 술·담배를 금하며 친목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무우원의 조직은 총책임자인 집행 위원장을 두고, 그 밑에 총무부·경제부·과학부·선전부·종교부·문예부·후생부의 7부서를 두기로 하였다. 우선적으로 선정된 간부를 보면, 집행 위원장에 조형길(趙亨吉), 총무 부장에 현영만, 경제 부장에 김병욱 등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1년 1월 조형길은 일본 도쿄 아사쿠사[淺革]에 있는 불교 전문 학교에 유학하면서 조직 확대에 힘썼다. 우선 함경북도 출신으로 일본에 공부하려 와 사설 영어 학교에 다니던 학생 강증룡(姜曾龍)을 포섭하고, 이어서 평양 출신의 최수원(崔壽源)이 포섭되었다. 이들은 도쿄 시기나미구[杉並區]에 있는 강증룡의 숙소에서 모임을 가지며, 조직 확대에 노력하였으며, 일본 도쿄에서는 박희경(朴希景)[부산], 김기동(金基東)[경상북도] 등을 회원으로 확보하였다. 그즈음 국내에서는 김병욱, 현영만, 이형수 등이 1941년 3월 말에 대구 사범 학교를 수료하고, 일선 초등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고, 무우원의 조직 확대에 힘썼다. 국내에서는 김병욱·현영만의 노력으로 서영수[경상남도]·박찬억[평양]·김창석[충청남도]·허병과 양산통도사 승려 윤석주(尹錫柱)·전찬조(田贊祚)가 동지로 영입되었고, 여성 동지로 이금선(李錦仙)[서울]·양경덕(梁卿德)[울산]도 참여하게 되었다.
무우원은 경제력 양성에 집중하였다. 저단금(貯丹金)이라는 명목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경제 부장 김병욱에게 보내면, 김병욱은 저단금으로 소 8마리를 사서 달성군 하빈(河濱) 지방 농가에 입식시킬 계획이었다. 1941년 9월 하순에는 조형길이 도쿄의 숙소에서 문장 연구, 곧 ‘글공부’라고 제호를 붙인 한국어로 적힌 글을 당시 공산(公山) 국민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이형수에게 보냈고, 이형수는 이것을 10부 인쇄하여 동지들에게 보냈다. 이 원고에는 "깊이 잠들고 있는 동지들을 일깨워 극락의 무역에서 영원히 살자!"라는 머리글이 실려 있었다.
1942년 9월 무우원은 일본 도쿄[東京]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장에 최수원을, 사업 부장에 강증룡을 임명하였다. 1943년 1월 3일 김병욱은 일본을 방문하여, 강증룡의 숙소에서 조형길·최수원 등과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병욱을 국내 책임자로 정하고, 향후 사업 계획을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병욱은 경제적으로 힘을 발휘하자면 최소한 1000만 원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1943년 6월 20일, 일본 도쿄강증룡의 숙소에서 조형길·최수원 등이 만나 무우원의 도쿄 지부 회의가 열렸다. 이때 집행장 조형길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미명 아래, 민족 차별 대우와 고통, 부자유를 자행하고 있는 일본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교의 신앙으로 강고한 정신력과 경제력을 길러야 한다."라는 격려사를 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