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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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城郡 人民委員會 |
이칭/별칭 | 달성 인민위원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5년 광복 직후 달성군에서 조직된 민간 자치 기구.
[개설]
광복 직후 결성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1945년 9월 6일 조선 인민 공화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달성군 위원회도 같은 해 10월에서 12월 사이에 달성군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인민 위원장에는 김선기가 선정되었다. 대구의 북성로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였다. 달성군 인민위원회의 지역에 대한 통치 정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광복 이후 경상북도 지역 정치의 중심이 된 대구와 긴밀히 관계를 맺으면서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달성군 인민위원회의 통치 기능은 강력한 통치 기능을 행사했다고 보는 시각과 인민 위원회가 존재는 했으나 통치 기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고 보는 시각으로 나뉘어져 있다.
[설립 목적]
달성군 인민위원회는 광복 직후 치안과 행정 안정, 식량 확보 등을 통한 자치를 목적으로 하였다.
[변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달성군 위원회가 달성군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지역의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권을 장악해 나간 것으로 보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물들도 일정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면 단위에는 성서 분회처럼 달성군 인민위원회의 분회를 설치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복 직후 달성군의 치안과 행정, 식량 확보, 소작 문제 해결 등에 관해 자치를 운영하면서, 정치 상황의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하였다. 1945년 11월 20일에서 11월 23일까지 진행된 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정영우가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5년 12월 결성된 경북 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46년 1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를 둘러싸고 좌우익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달성군 인민 위원회 성서 분회에서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 결사대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주재소를 공격하여 3명의 경찰관과 그 가족들에게 상해를 입히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3명이 중상을 입어 관할 대구 경찰서는 달성군 인민위원회 성서 분회 회원 11명을 체포하였다.
1946년 3월 달성군 인민위원회 다사 분회의 전 지부장인 정영우 외 9명이 횡령 혐의로 구금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 달성군 다사면의 미곡 창고에서 소맥을 임의 방출하여 다액의 대금을 착복하고, 1945년 9월에 강제로 면사무소를 접수하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현황]
달성군 인민위원회는 면 단위에 분회를 설치하였는데, 달성군 인민 위원회 성서 분회와 다사 분회의 설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달성군에서도 전국적 양상과 마찬가지로 독자적 정치 활동으로서의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