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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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信託統治 反對運動 |
영어공식명칭 | Trusteeship anti-movement |
이칭/별칭 | 반탁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해 달성군에서 일어난 반대운동.
[역사적 배경]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는 미소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한반도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국제 회의였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완전한 독립을 기대하던 국내 정치 세력은 즉각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안이 임시 정부 수립안이라는 것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좌익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지지로 선회하는가 하면, 우익은 신탁 통치 반대운동을 계속 이어 나갔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달성군의 정치·사회 세력들도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안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나타내었다.
[경과]
달성군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1945년 12월 28일 달성군 인민 위원회가 대구시 인민 위원회, 조선 노인 조합 경북도 연맹, 조선 노동조합 대구 평의회, 조선 청년 총동맹 경북도 연맹, 대구 여자 청년 동맹 등과 공동 명의로 '조선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결의문'을 발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달성군의 우익 진영은 독자적 단체의 설립 없이 개인적 차원에서 대구·경상북도 우익 정치·사회 단체에 가입하거나 조선 독립 경북 촉진회를 통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달성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선 정치·사회 단체나 개인들은 1945년 12월 28일 대구 공회당에서 경상북도 인민 위원회와 조선 독립 경북 촉진회를 중심으로 90여 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된 조선 신탁 관리 반대 공동 투쟁 위원회[이하 공투위]에 참가하였다. 공투위는 1946년 1월 2일 대구역 광장에서 신탁통치 배격 시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달성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입장은 달성 인민 위원회가 소속된 경상북도 인민 위원회의 결의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의문에는 첫째,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서 발표된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결의에 대한 약속 위반이라는 것, 둘째 미소 양군이 조선 내에 주둔하는 것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치안 유지에만 그 사명이 있다는 선언에 배반되는 것, 셋째 약소민족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연합국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는 것, 넷째 조선 민족의 정치적 능력을 무시하는 것 등이 명시되어 있다.
[결과]
달성군의 신탁 관리 반대운동은 중앙 차원의 좌익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의 입장 변화가 나타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1946년 1월 20일 공투위 확대 회의를 계기로 좌우익은 각자의 길로 나갔다. 우익의 조선 독립 경북 촉진회는 경상북도 인민 위원회가 찬탁 입장으로 돌아서 반탁 운동을 분열시켰다며 공투위 탈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달성 인민 위원회가 소속된 경상북도 인민 위원회는 공투위를 해산하고 민주주의 민족 전선 대구시 위원회, 민주주의 민족 전선 달성군 위원회 등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달성군의 좌익 세력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안 지지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은 심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달성군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안의 국내 전달 이후 즉각 전개되었으며, 대구와 경상북도의 정치·사회 세력과 연대해 전개되었다. 또 달성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광복 후 달성 지역의 정세 인식이나 국가 건설 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준거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