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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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達城 |
영어공식명칭 | Korean War and Dalsu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6월 25일 - 6·25전쟁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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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7월 14일 - 육군 본부 대구로 이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7월 16일 - 피난 정부 대구로 후퇴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8월 1일 - 낙동강 방어선 구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9월 1일 - 북한군 대구·달성의 남북 양면 공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9월 6일 - 북한군 국군 제2군단에 의해 격퇴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0년 9월 15일 - 인천 상륙 작전 개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2년 2월 5일 - 달성군 제2대 국회 의원 보궐 선거 실시 |
[정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북한]이 발발한 전쟁에 대한 달성군의 상황.
[개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이후 7월 14일 육군 본부가 대구로 이전하였고, 7월 16일 피난 정부도 대구로 후퇴하였다. 달성군은 8월 1일부터 구축된 낙동강 방어선에 힘입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는 크게 입지 않았다. 특히 왜관-다부동 전투, 창녕-영산 전투, 가산·팔공산 전투, 신령 전투 등에서 아군이 북한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직적접인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9월 1일부터 북한군은 대구·달성의 남북 양면을 일제히 공격했으나 9월 6일 이미 영천에 진입해 있던 북한군이 국군 제2군단에 의해 파괴되었고, 북한 제15사단이 국군의 포위망에 끌려들어 완전히 격퇴되었다. 그리고 창녕(昌寧) 방면에서 진격해 오던 북한군은 미 해병대와 제9연대의 반격으로 밀려 났다. 9, 10월 무렵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낙동강 일대의 전투를 계기로 낙동강 방위의 위기는 지나갔다. 9월 15일에 벌어진 인천 상륙 작전은 공산군이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달성의 전쟁 상황]
6·25전쟁 중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의 낙동강 변에는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이 몰려 들었고, 대구에도 피난민이 격증하였다. 6·25전쟁 중 비점령지인 달성에서는 전재민에 대한 구호 활동이 적극적으로 수행되었다. 먼저, 식량 배급으로서 1인 1일 3합 기준으로 거주지 읍면을 통해 무상 배급하였다. 1·4 후퇴 뒤에는 남하한 피난민이 이동하는 요소의 읍·면 사무소에서 피난민에게 수 일분씩의 식량을 배급하였다. 다음으로 주거 및 정착 수용 시설의 보급이 긴급한 과제였다.
1차 후퇴 때는 여름철이었기 때문에 천막이나 노숙도 가능했으나 2차 후퇴로 피난민과 전재민의 수가 달성군을 비롯한 경상북도 내만도 수십만 명에 이르자 임시 수용 대책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공회당·학교 교사·교회 등의 건물을 개방하여 피난민과 전재민을 수용하였다. 그 뒤 1951년 8월에 「피난민 임시 수용 조치법」을 제정하여 여유 있는 민가에도 강제 입주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점차 주택의 복구·재건 그리고 임시 수용소의 설치 등으로 이를 처리하였다. 그 밖에 피난민의 교통편 이용, 피난민 집결지에 급식소 설치, 전쟁고아의 수용 구호 등의 구호 사업을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1951년 11월 중앙 도·군·읍·면에 관민으로 구성된 각급 구호 위원회를 설치하여, 대책을 수립하고 운영하도록 하였다.
전쟁 중 경상북도 내에서는 각종 전시 동원 활동이 전개되었다. 대한 청년단 경상북도 단부에서는 비상 위원을 조직하고 전시 동원과 선무 활동을 펼쳤다. 관민이 함께 관민 일체의 전시 대책 위원회 동원부를 만들었는데, 이곳의 주요한 활동은 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달성의 정치와 전쟁]
달성군에서는 1952년 2월 5일에 제2대 국회 의원 보궐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보궐 선거는 달성군을 비롯한 전국 8개구에서 실시되었다. 달성군의 보궐 선거는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곧 원외 자유당계인 배은희(裵恩希)가 2만 304표를 얻어 차점으로 1만 7007표를 얻은 대구 정치계의 거물인 서상일(徐相日)을 눌러 당선되었던 것이다. 또 정부는 1952년 4월 25일에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를, 그리고 5월 10일에 도 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기로 공고하였다. 경상북도의 경우 경상북도 의회의 의원 정수는 61명으로서 이에 경합한 총 입후보자 수는 166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선거구에 따라 무투표 당선자도 나왔다.
입후보자 및 당선자의 소속 정당은 자유 국민당·민주 국민당·국민회·대한 청년당·대한 노총 등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친정부 세력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때 달성군의 도 의회 선거 당선자는 무소속의 최한덕[1만 580표], 국민 회의송상태[9,293표]와 정무룡[5,222표] 등 3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