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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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一九 革命- 達城 |
이칭/별칭 | 4·19 민주 운동,4·19 의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60년 4월 달성군을 비롯해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민족 운동.
[역사적 배경]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이승만 단일 체제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관권의 개입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대구는 대표적 야당 도시로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민주당의 선거 구호가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수성천 변 강연에는 무려 10만 인파가 모여들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신익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자유당 후보인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가창진보당의 조봉암이 전국에서 100만 표를 확보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듯하였으나 ‘진보당 사건’으로 말미암아 진보 세력의 정치 세력화는 어렵게 되었다.
1960년 3월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 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정부와 자유당은 노골적인 관권 개입을 진행하였다. 많은 공무원들이 동원되었고,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실질적인 선거 본부가 되어 투표 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였다. 선거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은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민주당에서는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고, 전국에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60년 4월 18일 고려 대학교 학생들이 반공 청년단의 습격을 받는 사태가 발생하자 4월 19일에는 3만의 대학생 시위로 확대되었고, 고등학교 학생들과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무대로 몰려들자 경찰은 데모대에 대하여 발포하였다. 시위는 대구·달성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과]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생을 정치의 도구로 악용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 운동을 일으키고, 3·15 부정 선거 반대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19일 이후에는 부정 선거 반대 시위에서 반정부 시위 운동으로 전환해 나갔다. 4월 혁명 시기 달성과 대구에는 민주·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혁신 정당 운동이 전국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펼쳐졌다. 7·29 총선거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는 반민주·부패 세력 척결 운동, 신생활 운동, 평화 통일 운동, 이대 악법 반대 투쟁 등을 비롯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교원 노조 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결과]
4·19혁명 시기 달성에서는 한국 사회의 민주·민족 운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의의와 평가]
4·19혁명 시기 달성은 민주·민족 운동의 전개에 참여하고, 민주·민족 운동의 진전에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