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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피학살자유족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800469
한자 慶北被虐殺者遺族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60년 6월연표보기 - 경북피학살자유족회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61년 6월연표보기 - 경북피학살자유족회 해체
성격 유족회

[정의]

1960년 6월 대구 지역에서 국민 보도 연맹 사건과 한국 전쟁 전후 양민 학살 사건의 경상북도 희생자 유가족들이 결성한 단체.

[개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4·19 혁명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사회 분위기에서 6·25 전쟁 전후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유가족에 대한 배보상 등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긴급한 주요 사업으로 위령제, 학살 장소 확인 및 발굴 작업을 설정하고 추진하였다. 실제 가창골, 화원, 월배, 본리 등지에서 자행된 학살을 확인하고, 발굴 작업을 시행하였다.

[설립 목적]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 희생자의 명예 회복, 책임자 처벌, 유가족에 대한 배보상 등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그것은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식에서 표방된 요구 사항 하에서 확인된다. 곧 1. 학살 책임자는 공직 정치 무대에서 물러가라, 2. 피학살자 유족에 대한 정치 경찰 감시를 즉시 해제하라, 3. 정부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감행된 학살에 의한 고아와 노쇠자를 구원하라는 등이 요구 사항이었다.

[변천]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유족회 활동을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60년 10월 20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전 자유당 중앙당 부회의실에서 경상남도 및 각 시도 유족회가 참석한 가운데 전국 유족회 결성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경상북도 각 지역에도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동년 11월에 경북 경주 유족회가 결성되고, 월성 초등학교에서 경주 지구 유족회 주최로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또 동년 5월 말에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을 중심으로 성주 유족회가 결성되어 학살 장소 확인 및 위령제 개최, 시신 발굴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경산군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1961년 7월 군사 쿠데타 뒤 구성된 국가 재건 최고 회의가 반공법을 만들어 진보 세력을 탄압하는 동시에 국회와 지방 의회를 비롯한 15개 정당과 238개의 사회단체를 해산할 때 함께 강제 해산되었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국가 재건 최고 회의가 만든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반국가 행위죄로 군사 혁명 재판에 회부되었다. 1961년 12월 7일에 열린 군사 혁명 재판에서 경남북 관계 반국가 행위 일괄 선고를 통해 경북피학살자유족회 관련자에게 중형을 선고하였다. 이 재판에서 유족회 회장 이원식은 사형 구형에 사형은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부회장 이용노는 15년 구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첫 공식 행사로 1960년 7월 28일에 대구 역전 광장에서 유족 및 일반 시민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제를 개최하였다. 위령제 준비 위원회는 사전에 신문 광고와 방송, 전단 살포 등으로 위령제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 주리라”, “조국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처형 관련 군경을 색출 처단하라”, “유족에 대한 경찰의 정치적 감시를 해제하라”, “유족에게 보상금을 달라” 등의 현수막을 거리 곳곳에 내걸었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1960년 8월 20일 대구 지구 피학살자 유골을 수습하여 합동 묘비를 건립하기 위한 합동 묘비 건립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후 같은 해 9월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는 수창동, 지묘동, 송현동, 본리동 등 학살 현장을 답사하고,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다. 첫 발굴 작업은 같은 해 8월 21일 대구의 상인동, 송현동 등 5개소에서 진행되었다.

민간인 학살이 한국 전쟁 이전에 행해졌다는 유족회의 발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민간인 학살이 한국 전쟁 이후 계엄령 아래에서만 행해졌다는 경찰 측의 주장을 뒤엎는 증거가 되었다. 2차 발굴은 1960년 10월 1일에 만촌동과 고모동에서 진행하였다. 만촌동 형봉산 골짜기에서 28구의 유골을 발굴하였다. 3차 발굴은 1961년 3월 26일 송현동에서 유족 100여 명의 통곡 속에서 시굴식의 거행과 함께 발굴이 진행되었다.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학살 현장 발굴 작업과 함께 유족회의 전국적 조직 결성을 위해 적극 노력하여 1960년 10월 전국 유족회를 결성하였다. 또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장면(張勉) 정권의 반공 특별법과 데모 규제법의 제정을 반대하기 위해 1961년 3월에 결성된 이대 악법 반대 공동 투쟁 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3월 21일 경북 유족회는 대구역전에서 열린 이대 특별법 반대 시위에 참석하고, 대구역을 출발하여 전 법무부 장관 조재천(曺在千)의 집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현황]

2010년 6월 25일 서울 중앙 지법 형사 합의 21부[재판장 김용대]는 1961년 경북피학살자유족회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원식 등 당시 처벌받은 유족회 간부 3명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 뒤 2011년 3월 24일 대법원 3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 3명의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의의와 평가]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결성되어 한국 전쟁 전후 한국 정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현장 발굴을 통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위령 추모 사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유가족에 대한 배보상을 목표로 적극 활동을 펼쳤다. 그에 따라 달성과 대구에서 수많은 학살 현장을 발굴하여, 민간인 학살이 대규모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음을 규명하였다. 또한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전국 유족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4·19 혁명 이후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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