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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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興書院 |
영어공식명칭 | Inheungseowon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2길 26[본리리 730]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개항기의 서원.
[개설]
인흥서원(仁興書院)은 추황(秋篁)[1198~1259], 추적(秋適)[1246~?], 추유(秋濡)[1345~1404], 추수경(秋水鏡)[1530~1660]을 배향한 서원이다. 추황의 본관은 추계(秋溪), 초명은 추영수(秋永壽), 호는 회암(悔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추계 추씨(秋溪秋氏) 시조인 추엽(秋輅)의 아들로 1209년(희종 5) 진사시, 1213년(강종 2) 문과 급제후 예부 상서(禮部尙書)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추적은 고려충렬왕 때의 인물로 자는 관중(慣中), 호는 노당(露堂), 추황의 아들로 추계 추씨 3대조(三代祖)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민부 상서(民部尙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안향(安珦)에 의해 발탁되어 7품 이하 관리 혹은 생원들의 유학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편찬하였다. 추유의 자는 윤지(潤之), 호는 운신재(雲心齋), 추적의 손자이다. 1362년(공민왕 11) 성균시에 급제하여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추수경의 자는 청하(淸河), 호는 세심당(洗心堂), 추유의 5세손이다. 1591년(선조 24) 명(明)의 무강 자사(武康剌史)가 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돌아왔다. 곽산(郭山)·동래(東萊) 등지에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전주에서 전사하였다. 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됨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삼았다.
[위치]
인흥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2길 26[본리리 730]에 위치한다. 대구 화원 중학교[달성군 화원읍 성암로 48] 정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이동하면 앞산 순환로·대구 수목원, 화원 자연 휴양림·남평 문씨 세거지, 고령·화원 옥포 요금소로 향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화원 자연 휴양림·남평 문씨 세거지 방향으로 약 1㎞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인흥서원 안내판과 함께 인흥교가 나온다. 인흥교를 건너 약 200m 이동하면 인흥서원이 있다.
[변천]
인흥서원 건립 연대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근래에 간행된 단행본들은 대부분 1825년(순조 25)에 건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계당집(溪堂集)』에 수록된 「인흥서원기(仁興書院記)」 [서원 내 현판인 인흥 서원 창건기(仁興書院創建記)]를 비롯 『영남 읍지(嶺南邑誌)』, 『교남지』 등에는 1866년(고종 3)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인흥서원기」, 『영남 읍지』 등의 기록에 따라 1866년 건립된 것으로 정리한다.
인흥서원의 건립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인흥서원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인흥서원기」에 따르면 인흥서원이 위치한 인흥동은 추적의 장지이었으나 실전되어 오다가 552년이 지난 1853년(철종 4)[계축] 후손들이 비로소 묘소를 발견하고 묘역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이후 유림들의 논의를 거쳐 후손들과 힘을 모아 묘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1886년(고종 3) 추황을 가장 윗자리에 모시고 그다음 추적, 추유, 추수경 순으로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냈다. 재실의 명칭은 지명인 인흥동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서원 건립의 근거가 된 추적의 무덤에 대해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 『대구의 뿌리 달성』 등에는 서원의 남쪽 산기슭에 추적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디지털 용인 문화 대전에서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위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서원 내력은 사료의 소략으로 명확히 밝히기 어렵다. 『대구의 뿌리 달성』에 의하면 인흥서원이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1877년 대구 도호부 판관 김유현(金有鉉)이 쓴 「인흥서원 부조묘 개건기(仁興書院不祧廟改建記)」에는 서원이 훼철되었고 묘소와 부조묘만이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1년 간행된 『달성 군지(達城郡誌)』에도 ‘금폐(今廢)’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종 연간 사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헐린 것으로 짐작된다. 1938년에 복설되었다.
[형태]
인흥서원은 얕은 산자락 아래 동향하여 자리잡았는데, 크게 3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인 인흥서원과 외삼문인 숭봉문(崇奉門)을 축으로 구성된 강학 공간, 배면 우측으로 높게 대지를 조성한 후 내삼문인 추모문(追慕門)과 동서 축으로 사당인 문현사(文顯祠)로 구성된 제향 공간, 사당 우측에 토석 담장으로 일곽을 이룬 장판각(藏板閣)이 별도 공간을 이룬다. 외삼문 밖 우측으로 추적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다. 외삼문인 숭봉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지붕의 모습은 어간만 맞배지붕으로 하고, 양측 칸은 우진각 지붕을 이은 형태이다.
강당인 인흥서원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앙 협실형(中央夾室形)이다. 동재·서재인 관수란(觀水欄)과 요산료(樂山寮)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삼문인 추모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당인 문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통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고 신도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현황]
2005년 간행된 『달성군 일반 동산 문화재 다량 소장처 실태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인흥서원에는 고서 117종 187책, 책판 5종 143장, 현판 12건이 소장되어 있다. 고서의 경우 19세기 필사본이 대부분이며 『초간 선생 문집(草澗先生文集)』, 『서애 선생 문집(西厓先生文集)』, 『계동 선생 문집(溪東先生集)』을 비롯한 개인 문집과 『주역(周易)』, 『주례(周禮)』, 『중용(中庸)』 등의 경전이 있다. 책판의 경우 『명심보감(明心寶鑑)』, 『추계 가승(秋溪家乘)』, 『조군 영적지(竈君靈蹟誌)』 등이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 중 『명심보감』은 1869년(고종 6) 추세문(秋世文)에 의해 판각된 인흥재 사본(仁興齋舍本)으로 총 31매이다. 명심보감 판본으로는 유일본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현판의 경우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쓴 ‘인흥 서원’과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 가 쓴 ‘인흥서원 창건기’를 비롯한 요산료(樂山寮), 관수란(觀水欄) 등 12건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