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6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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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逸里 325遺蹟 |
영어공식명칭 | The Ancient Site at Dail-ri, Dal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325 |
시대 | 선사/청동기,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창국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에 있던 청동기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의 유적.
[위치 및 현황]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에 있는 가창 체육 공원 부지가 대일리 325유적이 발굴 조사된 곳이다. 대일리 325유적은 서쪽으로 국가 지원 지방도 30호선과 접하고 있으며, 북서쪽에는 가창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유적은 신천의 상류 지역으로 산쪽 선상지의 곡간 평야 일대 해발 142~149m 정도에 해당된다.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지형이며, 동쪽 가장자리 밖으로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곡류하며 흐른다. 1918년의 지형도와 비교하면 당시의 지형과 현재의 지형상에 큰 변화는 없으며, 신천의 흐름도 비슷하다. 즉 신천과 유적이 위치한 곳은 최소 5m 이상의 비고 차이를 보이며 자연 제방의 발달로 하천의 범람으로부터 비교적 안전 지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의 조사 전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계단식 논과 밭, 일부 복숭아를 재배하는 과수원과 밭 등이 있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대일리 325유적은 대구 가창 체육 시설 조성 사업으로 인해 대동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에 대한 지표 조사[4만 4300㎡]는 2007년 1월 2일부터 그해 1월 21일까지 실시되었으며, 조사 결과 삼국 시대~조선 시대의 토기·자기편들이 넓은 범위에 산포하고 있어 시굴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시굴 조사[4만 5580㎡]는 진입 도로 개설 등에 필요한 부지[1,280㎡]가 추가되어 2009년 6월 2일부터 같은 해 7월 6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 1동과 고상식(高床式) 건물 터 1동, 구 6기, 수혈 4기, 주혈[군] 등이 확인되었고, 청동기 시대의 유구가 확인된 범위[1만 5000㎡]에 대해 그해 8월 17일부터 동년 11월 13일까지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 1기와 고상식 건물 터 3동·수혈 1기·구 4기·주혈 44공, 청동기 시대~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자연구 5기, 시대 미상의 수혈 6기 등 총 64기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편과 붉은 간 토기[적색 마연 토기]편·돌도끼·박편 석기와 삼국 시대~통일 신라 시대의 굽다리 접시편·항아리[호]편 등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류 77점과 석기류 13점 등 총 90점의 유물이 선정되어 보고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는 유적의 남서쪽에 치우친 지점에서 1기가 확인되었으며, 고상식 건물 터 역시 집자리의 주변인 북쪽과 남쪽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집자리는 평면 형태가 원형이고 규모는 직경 5m 내외, 면적은 약 19.7㎡ 정도이다. 집자리의 내부 시설은 타원형 수혈과 그 외부에 양 주혈이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양 주혈 간 연결선의 주축 방향은 동서이며, 동쪽에 위치한 주혈에 인접하여 1공의 주혈이 더 확인된다. 중앙부 타원형 수혈의 바닥에는 깬돌 1매가 놓여 있었는데, 그 표면이 일부 타격되어 있었다. 집자리 내부에서 박편 석기와 미완성 석기가 소량이지만 출토된 점을 고려하면 중앙부의 타원형 수혈은 석기 제작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형의 평면 형태, 중앙부의 타원형 수혈, 수혈의 장축 방향과 나란하게 수혈 내부 양 가장자리의 중심 주혈 2개 또는 4개는 송국리형(松菊里型) 집자리로 알려져 있다. 평면 형태에 관계없이 중앙부 타원형 수혈 내 가장자리에 양 주혈이 있는 것은 휴암리형(休岩里型), 양단부 바깥에 양 주혈이 있는 것은 검단리형(檢丹里型)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로 볼 때 집자리는 송국리형 집자리, 그중에서도 소위 검단리형 집자리에 속한다. 아직까지 신천 변 일대에서는 송국리형 집자리의 조사 예가 그 이전 시기의 [세]장방형 주거지 조사 예보다 상대적으로 적고, 출토 유물도 소량이어서 송국리형 집자리를 포함한 이 시기의 문화상 파악과 전후 시기의 계기적인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유적은 송국리형 집자리와 구연부를 향해 내만하는 무문양의 파수부 깊은 바리 모양 토기[심발형 토기]로 볼 때 청동기 시대 후기 후반에 해당되며, 집자리 목탄 시료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400BC[95.4%]200BC, 편년 BC8~BC3C]와도 대체로 부합된다.
고상식 건물 터는 생활 면이 직접 바닥에 닿지 않으며, 기본적 구조로 추정되는 바닥 아래를 트이게 한 것과 외벽을 만들어서 계단을 이용한 다층 건물이 있다. 조사된 3동의 평면 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으로 구분되며 면적은 2.5~8.7㎡ 정도이고 규모 면에서 [중]소형에 속한다. 주축 방향은 대체로 남북이며, 1호는 유적의 남쪽 경계부에 치우친 지점에, 2호·3호는 유적의 중앙부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서로 인접하여 위치하는데 1호와는 약 30m 떨어져 있다. 세부적인 건물의 성격이나 집자리와의 관계 등은 조사 면적의 제한 등으로 한계가 있으며, 주혈 내부에서 민무늬 토기편이 소량 출토되어 대략적인 시기만 파악될 뿐이다.
[의의와 평가]
대일리 325유적은 청동기 시대 마을의 일부를 발굴 조사한 것이고 유구의 수나 유물의 출토량도 다른 유적에 비해 적어 나름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유적의 주변으로 동 시기로 판단되는 대일리 고인돌 등이 분포하고 있어 마을의 범위가 유적에서 서편 구릉부 쪽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고, 신천 상류 지역에서 발굴 조사를 통해 청동기 시대 마을이 처음 확인되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