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7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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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守忠 |
영어공식명칭 | Chung SooChung |
이칭/별칭 | 경부(敬夫),문절(文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순한 |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지역에서 성장한 문신·학자.
[가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경부(敬夫). 증조할아버지는 정태보(鄭台輔)이고, 할아버지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 문신인 정희(鄭熙)이다.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정제(鄭提)로 보조공신(補祚功臣), 하원군(河原君)에 봉하여졌다. 어머니는 관찰사를 역임한 김약채(金若采)의 딸 광주 김씨(光州金氏)이다.
[활동 사항]
정수충(鄭守忠)[1401~1469]은 여동생과 같이 아버지를 따라 대구부 해안현(解顔縣)에서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1422년(세종 4) 족제(族弟) 채신보(蔡申保) 등과 함께 하양(河陽)의 향학(鄕學)에서 글을 읽었다. 아버지가 해안현의 집에서 돌림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게 되자 곧바로 돌아와 병시중을 들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처음에는 환관(宦官)들을 교육하였고, 뒤에는 세종(世宗)의 명으로 영응 대군(永膺大君) 염(琰)을 가르쳤다. 승의부위사정(丞義副尉司正)·경창부 승(慶昌府丞) 등을 거쳐 1449년(세종 31) 수부사직으로 경창부 승을 겸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 부교리가 되고, 훈련원 주부·서학 교수(西學敎授)·성균관 사예 등을 거쳤다. 1453년(단종 1) 행사용(行司勇)으로서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의 보좌 세력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 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데 가담하여 6품직에서 4품직으로 승진하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균관 사성이 되고, 1457년(세조 3)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하며 하원군(河原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해 의경 세자(懿敬世子)가 죽자 세조(世祖)의 명으로 주상자(主喪者)가 되었다. 1469년(예종 1) 9월 병환으로 인해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1438년(세종 20) 선영(先塋)을 참배하려고 대구부로 가다 성주에 들러 처숙부 민보열(閔普悅)의 집에서 묵으며, “나이 한창 젊어서 고향을 찾았지만 옛날처럼 새하얀 하나의 포의라네. 외로운 소나무 늦도록 푸르른 걸 의심 말게. 연말 추위 극심해도 끝까지 지조를 지킬 테니[年方强壯故鄕歸 皎皎如前一布衣 莫訝孤松含晩翠 歲寒應有後凋期].”라는 시 한 절구(絶句)를 지었다. 뒤에 정수충이 큰 인물이 되자 당시 사람들이 시참(詩讖)이라고 하였다. 1451년(문종 원년) 승문원 부교리로 수양 대군과 함께 집현전에 나아가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였다.
[묘소]
묘는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청백 서원(淸白書院)을 비롯하여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에 위치한 청절사(淸節祠),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화담사(花潭祠)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