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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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走+日} |
영어공식명칭 | Gwak Yul |
이칭/별칭 | 태정,예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전기 달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태정(泰靜), 호는 예곡(禮谷). 고조할아버지는 지익산군사였던 곽안방(郭安邦)으로, 청백리로 뽑혔다. 곽안방 대부터 현풍현 대니산 아래의 솔례동으로 복거(卜居)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부사정 곽승양(郭承陽), 할아버지는 참봉 곽당(郭瑭)이다. 아버지는 참봉 곽지인(郭之仁)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세은(曺世殷)의 딸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다. 부인은 승지 정사성(鄭思誠)의 딸 서원 정씨(西原鄭氏)이다. 큰아들 곽영희(郭永禧)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곽율(郭{走+日})[1531~1593]은 어릴 때 연일당(燕日堂) 곽지운(郭之雲)에게서 『소학』을 배웠으며,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한 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1572년에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로 벼슬을 시작할 때까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김해의 산해정에 있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정구, 김우옹, 배신, 김부륜, 박성, 곽준 등과 사귀었다. 1572년 벼슬을 시작하였지만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하여 김천도 찰방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1580년에 풍저창 직장에 임명되었다가 취임하기 전에 다시 내섬시 직장으로 옮겼다. 1582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고서 1585년[선조 18]에 송라도 찰방에 임명되었다.
1586년 학생으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에 특진되었다가, 이어서 홍산 현감(鴻山縣監)에 임명되었다. 이후 치적을 인정 받아 1591년 6월에 군자감 판관으로 승진하였으나, 1달 만인 1591년 7월 예천 군수로 승진되었다가 전임지의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초계군(草溪郡)의 임시 수령으로 임용되었다가, 다시 특진되어 예빈시 부정으로 전직 명령이 내려졌으나,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의 유임 상소에 의해 초계 군수로 유임되었다. 이후 왜적과 싸우다가 63세의 나이로 초계 관사에서 병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1800년[정조 24] 후손 곽진규(郭鎭圭)가 남은 글을 모아서 『예곡집(禮谷集)』을 편찬·간행하였다. 이를 다시 곽치현(郭致鉉)과 곽치숭(郭致崧)이 내용을 보완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묘소]
전란 중이라 임시로 고양(高陽) 용담(龍潭)[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의 임좌 병향에서 장례를 치렀다. 1595년[선조 28] 2월에 이장하였는데,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5년[숙종 21] 현풍 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도동 서원(道東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