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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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誡 |
영어공식명칭 | Choi Gei |
이칭/별칭 | 사훈,태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 달성군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훈(士訓), 호는 태동(苔洞). 할아버지는 어모장군 최해(崔海)이며, 아버지는 내금위 최종옥(崔宗沃)이다. 어머니는 하희수(河希壽)의 딸 진주 하씨(晉州河氏)로 최종옥의 둘째 부인이다. 부인은 설근(薛勤)의 딸 순창 설씨(淳昌薛氏)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생원 최동율(崔東嵂)이며, 둘째 아들은 대군 사부인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 셋째 아들은 진사 최동직(崔東𡸜)이다. 최동집의 손자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며, 최동집 이래로 후손들이 대구의 옻골[칠계(漆溪)]에 모여 살았다.
[활동 사항]
최계(崔誡)[1567~1622]는 1591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둘째 형 최인(崔認)과 조카 최동보(崔東輔)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2년 7월에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대구 의병 가장(大丘義兵假將)으로 차출했으며, 이후 금호강(琴湖江)과 팔공산(八公山) 및 경산, 달성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의병 가장으로 임명된 후 팔공산에서 세운 전공으로 주부(主簿)로 승진된 뒤 의주(義州)로 가서 왕을 모시게 되었다. 이때 대가(大駕)가 환도할 때 남은 적을 격파하여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었다. 1596년[선조 29] 통신 정사 황신(黃愼)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왔으며, 1607년[선조 41] 만경 현령(萬頃縣令)에 제수되었다. 이후 1618년[광해군 10] 훈련도감 파총(把摠)으로 있으면서 수군의 모집에 우수한 업적을 올려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어, 정3품 당상 천총(千摠)이 되었다. 하지만 북인 정권의 전제에 반발하여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저술 및 작품]
후손 최영진이 1847년 유문을 엮어서 『태동 최선생 실기(台洞崔先生實紀)』를 편찬하였다.
[상훈과 추모]
감사의 장계에 의하여 1812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