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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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然 |
영어공식명칭 | Il Yeon |
이칭/별칭 | 견명(見明),회연(晦然),무극(無極),목암(睦庵),보각(普覺),정조(靜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회연(晦然), 호는 목암(睦庵). 첫 법명은 견명(見明), 이후 법명은 일연(一然). 아버지는 경주의 속현이던 장산군(章山郡)[현재 경상북도 경산시]의 향리를 지낸 김언정(金彦鼎)이다.
[활동 사항]
일연(一然)[1206~1289]은 1214년(고종 1) 해양(海陽)[현재 광주광역시]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고종 6)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227년(고종 14)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포산(包山)[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무주암(無住庵)·묘문암(妙門庵) 등지에 머물면서 22년간 참선에 몰두하였다. 1237년(고종 24)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1246년(고종 33) 선사(禪師)의 법계(法界)를 받았다. 1249년(고종 36)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고종 43) 지리산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고종 46) 대선사(大禪師)를 제수 받았다.
12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였다. 1264년(원종 5) 경상북도 영일군[현재 포항시] 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 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원종 9) 원종의 명으로 운해사(雲海社)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였다. 1274년(원종 15) 일연이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仁興寺)로 개명하였다. 같은 해 비슬산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개명하고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1277년(충렬왕 3)부터 청도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충렬왕 7)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忠烈王)의 부름을 받았다.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283년(충렬왕 9)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를 받았다. 그 뒤,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84년(충렬왕 10) 조정에서는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로 지정하고 주재하게 하였다.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는데 이는 일연의 가지산문이 고려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한 것을 뜻한다. 1289년(충렬왕 15) 7월 인각사에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삼국유사』 5권, 『어록(語錄)』 2권, 『게송잡서(偈頌雜書)』 3권, 『조동오위(曹洞五位)』 2권, 『조도(祖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조파도(祖派圖)』 2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입적하던 해에 군위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다.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