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800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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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炳和 |
영어공식명칭 | Seo Byeonghwa |
이칭/별칭 | 달원장종(達原莊種)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에 달성군에서 활동한 친일 경제인.
[활동 사항]
서병화(徐炳和)[1883~?]의 본관은 달성(達城), 일본식 이름은 달원장종(達原莊種)이다. 1883년 9월 대구부 동성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에서 태어났다. 1908년 대한 제국탁지부 임시 재원 조사국 양지과 대구 출장소 기수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 일 병합 직후인 1910년 조선 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 대구 출장소 측량과 기수가 되어 1910년대 일제가 식민지 농업 정책으로 추진한 토지 조사 사업을 수행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 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 측량과 기수를 거쳐, 1918년에 이르기까지 같은 임시 토지 조사국의 기술과와 측지과에서 일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이 마무리된 뒤에는 경상북도 달성군의 서기가 되었다. 서병화는 1919년 군 서기를 퇴직하고, 대구에서 사법 대서업을 운영하였다.
서병화는 일제가 1920년대 식민지 농업 정책으로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수리 조합이 설립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1924년 5월 달성군 수성면의 수성 수리 조합, 1928년 동부 수립 조합 설립에 참여하여, 달성군 수리 조합의 중요 인물로 부각되었다. 1925년에 지역의 경제인들이 설립한 조양 무진 주식회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29년 남선 양조 주식회사, 1930년 조선 국자 조합 주식회사, 1937년 광업을 종목으로 하는 대구 산업 주식회사, 1937년 대동 주조 주식회사, 1938년 경북 무진 주식회사, 1939년 금융 신탁업의 친우 합자 회사(親友合資會社), 1939년 대구 약주 조합 등의 법인에 자본을 투자하고 중역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서병화는 대동 주조 주식회사와 대구 약주 조합의 대표 이사를 1939년에 역임하였다.
1931년 서병화는 일제의 지방 자문 기구인 대구부회의 의원이 되었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대구부 제2 교육부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이 가운데 1933년 달성군을 선거구로 한 경상북도 도회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1933년 7월 17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도회 의원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원을 선고받고 당선이 무효되었다.